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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Jun 20. 2023

한나의 항변, 마지막 시험

오늘이 대부분 학생들에게는 한 달간 대장정의 마지막 날이다.

큰아이도 오늘 물리를 마지막으로 시험이 다 끝났다.

나는 오늘 그동안 내가 줄곧 담당했던 한나와의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출근을 하니 매니저가 나는 오늘 시험감독을 하지 말고 옆에 있어보란다.

오전에 변수가 생길 수 있는 곳에 투입되거나 학교에 현장학습이다 뭐다 해서 교사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라 커버수업에 투입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한나와 그동안 쌓아온 라포가 있어 마지막 시험에 들어가 안아주지는 못하더라도 마지막으로 시험이 종료되면 악수라도 하면서 그 아이의 미래에 행운을 빌어주고 싶었다. 아쉬운 마음에 대강당 시험 세팅을 도와주며 혹시 한나가 시험교실로 가기 위해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지 않나 수시로 문을 열어 확인해 보았다. 시험 10분 전에 한나가 보였다. 그래서 얼른 나가서,


'한나야, 오늘 아쉽게도 내가 너의 감독으로 들어가지 않게 되었어. 시험 잘 보고, 앞으로 무엇을 하든 너는 똑똑한 아이니까 잘할 거고 행운을 빌어!'


'안 돼요! 왜 감독관님이 안 들어와요! 그럼 누가 들어오는데요! 왜 안 되는데요. 저한테 이럴 수는 없어요!'


너무 강한 반발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이 아이에게 어느 정도 믿음을 준 것 같아 뿌듯한 마음도 있었다.


'나도 들어가고 싶지만 오늘 학교가 교사들이 부족해서 내가 커버수업을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넌 누가 들어오든 잘할 거야! 굿럭!!!'


그랬더니 여전히 흥분된 목소리로 주변에 다른 시험 감독관들도 있는데 억울해하며 들어와 달라고 사정을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조금은 민망해져서,


'한나야 누구 보면 내가 감독하면서 너한테 답이라도 알려주는지 알겠다. 누가 들어오면 어때.'라고 말하고 웃어넘겼다.


곧 커버 스케줄이 3교시에서 5교시까지로 잡혀 나왔다. 시험은 1교시에서 2교시에 걸쳐 치러지기 때문에 한나 감독을 들어가도 될 것 같아 매니저에게 말하니 갑자기 실내 체육관에 배치된 감독관 한 명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긴급하게 그리로 가달라고 부탁을 했다. 시험이 다 끝나고 시험지를 걷어서 시험지보관사무실 앞에서 매니저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나가 그리로 지나가는 게 보였다.

'한나야! 시험 잘 봤어?'라고 반갑게 인사하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괜찮아요.'라고 굳은 얼굴로 말하고는 휙 지나가는 게 아닌가... 너무나 평소 한나 같지 않은 모습에 조금은 당황을 하고 있는데 조금 뒤에 매니저가 와서 하는 말이,


'방금 한나가 내 사무실에 와서 한바탕 하고 갔어. 어떻게 자기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왜 본인에게 미리 상의도 안 하고 자기들 맘대로 감독관 교체를 하냐고! 사전에 자기한테 말도 없이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냐고 한참을 쏘아붙이고 갔어! 아니 이게 학생에게 내가 상의할 일이니?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고마워하지는 않고 말이야. 참, 할 말이 없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일반 학생이라면 무례하다고만 생각하고 넘겼을 수도 있는데, 독방에 배정되는 학생들은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고 그래서 매니저도 가능하면 한 사람이 전담할 수 있도록 최대한 스케줄을 짜고는 있는데 마지막날 많은 변수가 생길 것을 고려하다가 이런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 말을 같이 듣던 케이티는 나중에 나한테 슬쩍 '한나 같은 아이들한테는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게 힘들 수 있어.' 케이티는 아들이 자폐증이 있어서 아무래도 더 한나 입장이 이해가 가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중간에 한두 번 감독관이 바뀌었었다면 한나도 이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 마지막 시험날 갑작스러운 감독관 교체가 한나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문제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종의미를 거두며 멋있게 한나의 미래에 응원을 보내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아쉽고, 한나가 겪었을 마음의 소용돌이가 안쓰러웠다.


그렇게 한나와는 한 달간 스무 번도 넘게 만나 시험을 봤다. 이번주 수요일만 해도 시험이 너무 길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그거 알아요? 지난 3주 넘는 시간 동안 제가 집에 같이 살고 있는 오빠보다 감독관님이랑 보낸 시간이 더 길어요.'

이 말에 우리 둘은 한참을 같이 웃었다. 한나가 이번에 다시 한번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과 변화에 조금 더 유연하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본다.


이것으로 나도  작년 11월에 시작해서 이 학교의 시험감독관 1년 사이클을 돈 샘이다. 그동안 영국이란 나라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참 많았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일은 안 할 줄 알았는데 학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게도 되었고, 나름 주부생활을 즐기고도 있었지만 세상엔 아직도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에 살아가는 의미를  더 둘 수 있게 되었던 값진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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