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목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내준 과제는 자신의 롤모델을 포스터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독일어만 사용할 수 있다. 크롬북이나 종이에 해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의 출석을 부르고 필요한 학생들에게 종이를 나눠주고 교실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롤모델은 과연 누구일까 보게 되었다.
대부분 가수들이 전부였다. 내가 아는 이름으로는 브루노마스, 테일러스위프트, 올리비아로드리고 등등.
앞에 앉는 엘시는 수업시간에 앞을 보지 않고 늘 옆으로 앉아 뒤에 있는 학생들과 눈만 마주치기라도 하면 떠드는 게 일이다. 오늘 엘시에게 다가가서
"엘시, 앞을 보자.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집중이 힘든 거야."
"전 이렇게 앉는 게 편해요. 집에서 공부도 바닥에서 해요"
"일단 앞을 보고 앉아봐. 그렇지. 그리고 의자를 좀 앞으로 당겨보자. 그래 이제 좀 낫지? 편하지?"
"아뇨. 전혀 편하지 않아요."
"아니야. 그래도 그렇게 앉아야 해. 너보다 오래 살고 경험 많은 내 말을 듣는 게 너한테 좋을 거야. 날 믿어!"
"근데, 선생님은 롤모델이 누구예요?"
"......"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나는 답을 바로 할 수가 없었다. 젊어서는 나도 롤모델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가수들과 야구선수들을 열심히 추앙하며 그들처럼 한 분야에서 최고가 돼야 한다고 채찍질하며 살았다.
그리고 남편을 만나고 같이 알게 된 스콧니어링과 헬렌니어링의 책을 접하면서 그들처럼 살고자 서울생활을 접고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열심히 살며 돈을 모아 땅을 사고 집을지어 소박하게 살아가고자 10년 정도 노력했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부터는 직장 생활하며 아이들 키우는데 지치고 떠밀려 살듯 살다가 어느 순간 결심을 했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직장을 관두고 아이에게 집중하겠다고. 그런 말을 하는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뭐라 했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가면 돈이 이제 마구 들어가야 하는데 돈을 안 벌고 오히려 집에 있겠다고? 퍽이나 그렇게 되겠다' 결국은 큰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해에 직장을 관두고 아이들에게 집중하고자 했었다. 한국에서 보단 영국에서 더 수월하게 아이들을 뒷바라지할 수 있을 것 같고.. 남편도 이제 한국생활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기도 해서 결국 여기 영국까지 오게 되었다.
열심히 살아가고 싶은 나를 채찍질하기에 딱 좋은 방법이 롤모델을 정하고 종교처럼 믿고 그처럼 행동하고자 노력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근데 50이 멀지 않은 지금 이 나이에 갑자기 롤모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아 생각해 보니 내 나이 어느 정도 되고부터는 롤모델이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내 인생 가족에게 집중하고 내가 착하고 성실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자라고만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내 모습에 굳이 채찍을 가하며 누군가를 쫓아가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롤모델을 정하기 보단 인생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이리라.
"나는 롤모델이 없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없어."
"에이, 그래도 있을 거 아니예요? 없다면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도 있을 것 아니에요. 누굴 좋아하는지 말해보세요"
"좋아하는 사람이야 많지. 정말 아주 많지."
엘시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엘시의 몸은 다시 옆으로 틀어졌다. 맨 앞에 앉아 앞면만 응시하는 것이 어색하고 싫어서 그러는 건지... 아님 그저 집중을 하기 힘든 스타일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엘시 덕분에 나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얼마나 현실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지에 감사도 했다. 앞으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렇게만 살면 될 것이라고 다독다독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