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어머님에게 전화가 왔다. 전날 무슨 바이러스에 감염이 됐는지 배탈이 나서 새벽부터 한잠도 못 잤다고 집에 계시겠다고 했다. 혹시 우리들에게 전염될까 봐 걱정이 되셔서 일 년에 한 번 있는 그 중요한 크리스마스디너에 참석을 못하시고 혼자서 집에 계실 어머님을 생각하니 우리 모두는 흥이 나지 않았다.
남편이 마음이 불편한지 어머님을 위해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지고 어머님 집에 잠깐 다녀왔다. 그리고 어머님이 우리 모두를 위해 준비한 선물가방을 가져왔다.
작은 고모네 집에서 칠면조구이와 각종 음식을 차려 먹은 뒤 우리는 하나하나 선물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남편은 어머님이 준비한 선물을 뜯어보고 매우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건 바로 스코틀랜드햄 하기스다. 엄마가 자기를 위해 왜 이런 걸 샀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다.
다음날 어머님몸이 좋아졌다고 해서 우린 차나 한잔 같이 할 겸 어머님집에 갔다. 어머님은 아들이 좋아하는 하기스를 사기 위해 동네 정육점에 갔다가 다 팔리고 없어서 다음날 아침 7시부터 가서 마지막 남은 것을 샀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그 얘기를 해주니 그런 엄마의 마음은 고마운데 자기는 하기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전히 어쩔 줄 몰라했다.
어머님은 요즘 우리와 대화할 때 반응 속도가 많이 둔화되었고, 채팅을 할 때도 빠트리는 단어들이 종종 생겼다. 스펠링이 틀린 거야 우리도 하는 실수지만 단어를 빠트리는 것은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는 문제 같아 보였다.
얼마 전에 남편이 어머님에게 전화해서같이 저녁 먹자고 하니 어머님이 재킷포테이토를 준비하겠다고 해서 우리 네 식구는 어머님 집으로 갔다. 오랜만에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먹겠구나 하고 잔뜩 기대하고 온 남편은 오븐에 구워진 감자를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의 아들이 많이 먹는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아실 테고 큰손녀딸이 한 참 먹을 나이라는 것도 아실 텐데... 먹을 입은 다섯인데 중간 크기 감자네 개만 구우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감자가 크니 어머님이랑 나랑 반을 나눠 먹으면 된다고 하셔서 나는 그거면 나도 충분하다고 말했고, 얼른 거실로 가서 tv를 보고 있는 두 딸에게,
'감자는 4개밖에 없어. B가 엄마랑 나눠먹자. 그리고 다른 사이드 음식도 별로 없어. 엄마가 집에 가서 다시 저녁 만들어 줄 테니까 할머니 눈치 주지 말고 맛있게 먹어'
뭔가 개운치가 않았다. 감자랑 같이 준비한 음식은 샐러드 한 접시... 그게 다였다. 물론 감자 위에 올려먹을 체다치즈를 갈아놓으셨지만 누가 봐도 저녁으로 먹기에는 너무도 적은 양이었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다리가 불편하셔서 따로 장을 보지 않으시고 집에 있는 것으로 차리셨나 보다 했다.
그런데 남편이 밥을 먹으며 오늘 뭐 하셨나 물으니,
"응, 아침에 감자랑 이것저것 사러 슈퍼에 다녀왔어"라고 말하시는 것이 아닌가.....
요즘 일련의 상황들을 고려하여 나는 남편에게 어머님의 치매검사를 적극 추진해 보라고 했지만 남편입장에서 말을 꺼내기가 힘든 문제라 고민을 하는 것 같다. 미리미리 검사받고 약을 복용하면 늦출 수 있다고 미루지 말라고 재촉하니 새해가 지나고 나면 말을 해보겠다고 했다.
친정엄마는 친구들이 모두 치매약을 먹는다고 어느 날 병원에 가서 무작정 의사에게 치매약을 처방해 달라고 했다. 자주 가는 병원이라 의사 선생님이 엄마를 아셔서 그런지 몰라도 "어머님은 아직 안 드셔도 돼요. 아주 한~참 있다 오셔요~"라고 했다고 껄껄거리시며 웃으셨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식들한테 부담 주지 않으려고 80 나이심에도 본인이 알아서 병원도 척척 미리미리 다녀오시고, 아침마다 운동도 다니신다. 시어머니를 보며 답답해하는 남편을 보니 갑자기 엄마에게 더욱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