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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상 Jan 08. 2023

독감 해방일지Ⅰ

코로나도 피해 갔던 아이가 독감에 걸렸다.



병원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양볼이 발그레 오른 아이의 손을 잡고 계단을 두 개씩 겅중겅중 오른다.  

대기명단에 한 줄이라도 앞서고 싶은 욕심이었으나

이미 검정글씨로 가득했고, 겨우 찾은 여백에 아이의 이름을 겨우 갈겨 넣었다. 


 빼곡하고도 들쭉날쭉한 대기실의 환자들은

마치 방금 작성한 대기명단의 확대판처럼 보였다.

알 수 없는 바이러스 틈을 비집고 들어간 우리는 멀뚱히 앉아 있거나 휴대폰 화면으로 빨려 들어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진료실로 입장할 수 있었다.




 진료를 보던 의사 선생님께서 목이 상당하게 부었다며 친절한 목소리를 건넨다.  '올게 왔으니 그런 줄 알아라'라는 속뜻이 담긴 듯 차분했다.


  독감과 코로나 검사를 하는 게 좋겠다는 발랄하신 목소리에 엄마는 의사 선생님과 눈을 찡긋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에게 검사실행 여부를 알릴 틈도 없이 코 깊숙한 어느 곳으로 면봉이 힘차게 빨려 들어갔다. 한쪽은 독감, 한쪽은 코로나검사로 두 번이나 가차 없이 쑤셔지는 동안 아이는 눈살을 찌푸릴 뿐, 놀라울 정도로 태연했다.


 아이의 양팔과 다리를 짓누르며 각자의 구역에서 충실하던 간호사님 세 분의 머쓱한 손은 아이를 향한 엄지손가락으로 바뀌어있었다.

하이톤으로 대단하다는 말을 연신 아이에게 쏟아내며 흡족한 표정을 아끼지 않는 모습에 이곳이 소아과인가 하는 착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들을 보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이 공간에서 벌어져왔는지 감히 가늠이 갔다. 나 역시 그 난리를 몸소 겪어온 당사자 아니던가.  


'나 이만큼 키웠다.' 있는 힘껏 자지러지는 아이 앞에서 쩔쩔매는 젊은 아빠를 지나치며 괜히 으쓱거리는 어깨가 민망했다.




10분이 채지나지 않아 간호사님은 우리에게  A형 독감 통보를 해왔다. 나지막하고 굵은 목소리였다.

 치료법으로는 타미플루 약처방을 받고 5일 동안 복용하는 방법과 페라미플루 수액을 맞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전자는 정확히 12시간 간격으로 하루 2번, 5일 동안 약복용을 하며, 드물지만 간혹 가다 부작용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후자는 한 번의 수액투여로 5일간 복용해야 하는 타미플루약의 번거로움을 덜어주며 보통 3일 정도면 회복을 보인다고 한다.

 누가 봐도 수액 맞출 상황을 참 장황하게 설명한다 싶더라니 타미플루는 약처방은 만 원대, 테라미플루는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8만 원대라는 말을 조심스레 덧붙였다.

 아이가 밤새 고열로 고생할 생각을 하면 하루라도 빠른 회복이 가능하도록 수액을 맞춰야 했다.

널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날 위한 일이기도 했으니 8만원은 2인분 값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출처 pixabay

 

수액을 다 맞고 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려나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조급해졌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선생님, 그럼 수액으로 맞..." 말이 채나기도 전에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아이가 있는 힘껏 옷을 잡아당기며 매서운 눈으로 쏘아본다.



 하, 느낌이 좋지 않다.

 "엄마, 나 약으로 먹을 거야." 단호한 말투에 순간 차가운 공기가 얼어붙었다.

 "선생님~ 아이랑 얘기해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라며 바빠 보이던 간호사님을 되돌려 보냈다.


 다시 얘기해도 내가 낳은 이 아이는 굳건하게 본인 의사를 꺾지 않으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최선을 다해 설득해 본다. 엄마의 이야기를 무표정으로 듣던 아이는 "독감은 내가 걸렸는데 왜 엄마가 그걸 결정하려고 해~ 나 진짜 수액 맞기 싫다고." 짜증 섞인 말투를 쏟아냈다. 독감과 함께 더 알싸하게 버무려진 사춘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열한 살짜리를 설득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했던 나의 스킬을 좀 더 연마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처방전을 받고 터널터널 약국을 향했다.




약국 안은 지친 기색으로 의자 위에 널브러져 있는 무채색의 어른들과 각종 캐릭터 비타민과 장난감 앞에서 기웃거리는 아이들로 엉켜있었다.
자신의 의견을 당차게 주장하고 수액을 거부한 그 아이는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뽀로로 립밤을 만지작거린다. 엄마를 쳐다보는 눈빛이 새삼 부드럽다.

좀 전에 아낀 수액 값으로 치면 립밤 열댓 개도 사줄 수 있었지만 단호한 눈빛과 더불어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시그널을 보낸다.


나의 소심한 복수였을까.




1시간 넘게 바이러스 틈에서 진료 대기를 한 탓인지, 독감 판정 후 아이와 실랑이를 벌인 탓인지, 넘쳐나는 환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약국 의자 탓이었는지 벌써부터 진이 빠졌다.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독감은 네가 걸렸지만 밤새 간호는 내가 할 거잖아, 이 녀석아!'라는 말을 마음 속에 삼켰다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이제 곧, 무시무시한 독감수발기를 시작한다.



* 2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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