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한달살이(2017-18)_체스키 라이
속담이나 명언이 훅 와닿는 그런 순간이 있다. 너무나 익숙한 속담인데도, 그 뜻을 충분히 알고 있던 말인데도, 어느 날 처음 듣는 말처럼 나에게 다가오는 그런 한 구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날은 하늘의 도움을 받아 낯선 땅 낯선 공간에서 무사히 귀가한, 가슴을 쓸어내린 하루였다.
프라하에는 며칠 동안 눈이 내리고 추웠다. 귀국은 1주일 앞으로 다가왔고, 체스키 라이에 대한 준비는 아직도 미흡했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며칠 동안 날씨, 루트, 준비물 등을 고심하다, 드디어 눈 예보가 없던 어느 날, Jicin행 버스에 올랐다. 맑았던 프라하를 떠나, Sobotka를 지날 때는 진눈깨비가 흩날렸고, Jicin에 다 와갈 때는, 눈으로 뒤덮인 산과 마을만 보일 뿐이었다. 과연 우리는 체스키 라이의 Prachov Skaly를 볼 수 있을까? 안되면 Jicin 여행만 할 마음의 준비도, 어쩌면 1박을 할 숙박 준비도 모두 한 상태. 엄마만 믿고 따라오는 아이들 때문에 겁이 덜컥 나다가도, 겁 없는 아이들을 보면 그들 때문에 힘이 나기도 했다.
Jicin에 도착하자마자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았다. 그곳의 직원은 ‘오늘 같은 날 Prachov Skaly 입장이 가능하냐’는 나의 질문에 별 것을 다 묻는다는 어투로, Of course를 연발하며 버스 편과 정류소에 대해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모두 다 사전 준비로 알아둔 것이었지만, 친절한 직원의 의욕을 깨고 싶지 않아 처음 듣는 듯, 큰 도움을 얻는 듯 경청하고 메모했다. 어쩌면 내 마음은 그 직원의 확신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나의 고향 산골에나 다닐 것 같은 마을버스에 몸을 싣고 산으로 다가갔다. 눈 덮인 산 입구에 우리만 내려놓고 버스는 아무 걱정 없는 듯 무심히 떠나갔다. 하지만 이제는 망설일 타이밍이 아니다. 구글맵에서 봤던 대로 입구를 찾고 이정표를 확인하며 산을 올랐다. 눈 위에 선명히 찍힌 발자국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었다.
이제는 타협이 필요할 때! 첫째, 위험한 곳은 가지 않는다. 둘째,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이는 곳은 가지 않는다. 셋째, 위험해 보이는 곳은 다음을 위해 미뤄두고 지금은 가지 않는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코스를 선택했다. 눈으로 뒤덮인 산속에서 길을 잃은 순 없으니, 누가 봐도 선명하고 안전한 길만 걸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딸아이 운동화 밑창이 너무 미끄러워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준비가 부족했던 나를 탓하며, 내 부츠와 바꿔 신었다. 나는 걸음이 불편해졌지만, 아들과 딸이 함께 눈싸움을 하며 즐기는 모습을 보니, 내가 네발로 걷더라도 신발을 바꿔신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뷰 포인트를 하나만 보고,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현재 루트에서는 이것이 다인가' 하고 서운해할 무렵, 우리 눈앞에 펼쳐진 두 번째 뷰 포인트는 더 탐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모두 날려 주었다.
좀 더 멋지게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두리번거리다 보니, 순간 아찔하다. 안전 펜스도 제대로 없는 낭떠러지 바위, 여기서 미끄러지면 끝이겠구나. 다시 한번 안전을 우선시하며 돌아 나오는 길에, 개를 산책시키는 현지인 할아버지 한분, 반대편으로 올라온 외국인 커플이 우리가 만난 전부였다. 이런 공간에서 갑자기 마주하는 낯선 이는 반가움을 주기도, 오히려 겁이 주기도 한다. 그날, 안전에 대한 나의 예민함은 거의 모든 요소를 위험으로 감지하도록 만들어 놓은 듯했다.
미끄러운 운동화로 내리막을 걷는 것은 오르막을 오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더 어려웠다. 한발 내디디기도 어려운 길, 곧 어두워질 텐데 어떻게 우리는 산을 내려가야할까? 결국 해결방안을 찾은 것은 아이들이었다. 미끄러움을 이용하여 내려오는 것! 단단한 신발을 신은 아이들이 나의 손을 잡고 끌어주어서 무사히, 그것도 재미있게 내려올 수 있었다! 어려움을 역으로 이용하여, 서로 밀고 끌며 무사히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을 성공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중요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Prachov Skaly를 안전하고 무사히 다녀온 것이, 내가 노력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노력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어쩌면 다시는 이렇게 무모한 여행은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할 정도의 위험한 순간이 분명히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오늘 여행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다. 내가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프라하로 돌아오는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처음 이 말을 듣고 그 의미를 깨달은 아이처럼...
아이들 때문에 걱정이다가도, 아이들 덕분에 힘이 난다. 저 아이들은 알까? 자신들이 엄마에게 얼마나 든든한 존재이고, 엄마를 든든하게 만드는 존재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