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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꽃 필 무렵

아빠 이야기

by limstory

‘참꽃이 피면 가고 싶다’ 던 병상의 아빠는 봄날처럼 따뜻했던 음력 1월 2일에 돌아가셨다. 봄날 산에 올라 진달래를 보면, 항상 그렇듯 돌아가신 아빠가 생각난다.


처음 해외에 나갔을 때, 나는 대학 3학년을 마친 후 휴학 중이었고,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4개월을 보내고, 영국에 가서 5개월간 어학연수를 한 후, 이집트와 터키를 각각 3주 여행 후, 영국을 거쳐 귀국했다. 경남의 시골에 계시던 엄마 아빠는 마침 서울에 먼 친척의 결혼식이 있다며, 공항까지 나를 마중 나오시겠다고 했다. 거의 1년간의 해외 체류 동안 몇 번이나 리턴 티켓의 일정을 바꿔가며 돌아온 것은 2000년 12월의 어느 추운 날이었고, 김포 공항에서 엄마 아빠를 만났다. 수술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했던 엄마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아빠는 뒷전이었다. 한 번도 아빠 걱정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날도 그저 오랜만에 만난 엄마만 바라봤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에서도 나는 당연히 엄마와 나란히 앉았고, 아빠는 혼자 앉았다. 별안간 엄마가 ‘많이 놀랐제, 아빠 모습 보고…’라고 말문을 여셨을 때까지, 나는 살이 빠지고 머리가 빠진, 아빠의 달라진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뒷좌석에서 아빠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지만, 우리 아빠는 그 어려운 걸 해내신 분이다. 나는 나의 의지를 꺾고 아빠의 뜻대로 사범대학에 입학했고, 아빠는 그 이후로 항상 나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계셨던 것 같다.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아빠에게 ‘안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부터 줄곧 아빠는 나에게 졌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과 언니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돈으로 휴학을 하고 이스라엘 키부츠로 갔다. 두 개의 키부츠에서 발런티어로 지내는 동안, 아빠는 사랑과 믿음과 지지로 가득 찬 편지를 보내주셨다. 5월 초, 키부츠 생활을 끝내고 한 달간 유럽여행을 하고 귀국하려던 것을, 준비했던 여행경비로 영국 어학원을 등록하겠다며 돌연 런던으로 향했을 때도, 다른 부모들처럼 경제적 지원을 해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시며 그저 많이 배우고 오라고 하셨다. 영국 어학연수를 마치고 바로 귀국하지 않고 10월 말에 이집트와 터키 여행을 하고 오겠다고 했을 때도, 아빠는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만 하셨다.

나 하고 싶은 대로 모두 하고 귀국했을 때, 아빠는 암 투병 중이셨다. 발병이 4월이었으니, 내가 키부츠에 있으면서, 영국으로 건너가 어학연수를 시작할 방법을 알아보고 준비하던 무렵이었다. 마침 의료파업 중이라 초기 치료에 타이밍을 놓친 부분도 있었다지만, 진단을 받았을 때 암 초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아빠는 가족들에게 함구령을 내렸고, 엄마, 오빠, 네 명의 언니들은 막내인 나에게 어떠한 말도 넌지시 건네지 않았다. 사실 지나고 보니 넌지시 건네는 힌트는 곳곳에 있었다. 각 도시의 공중전화에서 나는 그 힌트들을, 그저 나이 들어 여성 호르몬이 많아진 아빠의 애정표현, 오빠 식구들의 효심, 언니들의 장난 정도로 생각했었다.

10월 중순 에든버러에서 아빠와 통화를 했을 때, 아빠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울음을 터트리셨다. ‘우리 아빠가 많이 늙으셨구나,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가 딸한테 사랑한다고 울고..’ 그날은, 수술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병원에 계시는 내내 휴대전화를 꼭 쥐고, 몇 주에 겨우 한번 전화하는 무심한 막내딸의 전화를 기다리셨단다.

한국 새벽 시간에 맞춰 전화하면, 이상하게도 올케언니가 전화를 받는 날이 많았다. 그때마다 엄마 아빠는 새벽부터 일찍 마을 행사에 가셨다거나, 일찍 과수원에 나가셨다고 했다.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우리 아빠, 여전히 바쁘시구나’하며, 부산에 살고 있던 오빠 부부가 왜 이렇게 자주 엄마 아빠한테 오냐며 핀잔을 줬었는데.. 아빠가 병원 치료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오빠 부부가 귀농을 했다는 사실은 귀국 후 알게 되었다.

11월 말, 페티에에서 전화를 했을 때도 아빠는 우셨다.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12월 초, 이스탄불에서 둘째 언니에게 전화를 했을 때 언니는 ‘이제 더 이상 어디 가지 말고 바로 좀 귀국하라’고 했다. 평소답지 않게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넷째가 결혼할지도 모른다며, 그러니 빨리 좀 오라고… 어쩐 일인지 넷째 언니가 퇴사했다더니 결혼 준비하려고 했나 보다며, 나 갈 때까지 결혼식 미루라는 말만 내뱉었었다. 이스탄불 블루 모스크 옆 광장, 길게 줄 서있던 공중전화에서, 언니가 아빠 병간호를 위해 퇴사했다는 것도 모르고, 변함없이 나는 자기중심적이었다.

01년도에 4학년에 복학했고, 아빠는 주기적으로 서울 병원에 다니셨다.(내가 귀국한 날도 서울에 친척 결혼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병원 진료가 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교원임용고사를 몇 주 앞두었을 때, 서울 병원에 가셨던 엄마 아빠가 예상보다 훨씬 일찍 시골집으로 돌아오셨다. 병원에서 경과가 좋다고 했다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임용고사 준비에만 매달렸다. 임용고사 당일, 시험을 마치고 나오니 넷째 언니가 마중을 왔다. 같이 점심을 먹으며 언니가 아빠의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몇 달 남지 않으셨다고, 지난번 병원 갔을 때 결과가 나왔는데, 막내한테는 임용고사 때까지 아무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 ‘언제나 변함없이 네 걱정’이라며, 언니가 사소하게 화를 낸다. 더 크게 화를 내도 나는 할 말이 없을 텐데, 언니의 사소한 화가 속상하다.

아빠의 병세는 계속 악화되고, 나는 임용고시에 최종 합격을 했다. 그때가 1월 말일인지, 2월 초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취방에 도착하니 작지만 알찬 꽃바구니가 놓여있다. 내 생애 첫 꽃바구니. 아빠가 보내주신 축하 꽃바구니.

그로부터 10여 일 후 아빠는 돌아가셨다. 내 합격 소식을 전화로 전해 듣고,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셨다고 한다. 원하지 않는 과에 진학시킨 막내딸이, 결국 아빠의 뜻대로 교사가 되는 모습을 보시고 눈을 감게 되어, 아빠는 그나마 웃을 수 있었을까?

아빠 말 듣길 잘했다고 아빠에게 말해주고 싶은, 참꽃 피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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