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모든 마음에 신이 깃들어 있다.

로마 한달살이(2015-16)_성 프란체스코의 마을, 아씨시

by limstory

나의 첫 해외 방문지는 이스라엘이었다. 대부분 3학년을 마치고 어학연수를 위해 휴학을 하던 시절, 나는 이스라엘 키부츠로 떠났다. 돈이 없으니 working holiday(워킹 홀리데이)로 용돈을 벌며 해외 경험을 해보자 싶었다. 원래 계획은 6개월 키부츠 생활을 하다가, 1개월 유럽여행 후 귀국하는 것이었는데, 그 계획을 완전히 수정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 laundry(세탁소)에서 빨래를 개고 있는데, 매니저가 들어오며, '에 포 조이?'하고 묻는다. 아직도 내가 들은 그 발음이 맞는지, 스펠링은 어떻게 쓰는지 알 수 없지만, 난 분명히 그 이스라엘 말을 알아들었다. '조이 어딨어?'


언어 습득의 과정을 체득하고, 영어 전공자로서 내가 가야 할 곳은 분명해졌다. 유럽여행을 하려고 가져온 돈을 그대로 들고 런던으로 갔다. 그곳에서 어학원 6개월 코스를 등록하고, 다시 도버해협을 왕복하는 배를 타고 immigration(출입국사무소)을 거쳐서 학생 비자를 받았다. 그렇게 하여 영국에서 파트타임을 구할 수 있는 합법적인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런던 한인타운에 계시는 전도사님 부부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초반에 정착할 때까지는 그분들의 집에 하숙을 했다. 가끔 돌아오는 식사 당번과 1주일에 한번 교회 예배를 봐야 하는 의무가 있었지만, 나에겐 큰 도움과 위안을 주신 분들이었다. 그곳에는 나처럼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넘어와 파트타임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서부터, 한국의 부유한 부모님들의 풍족한 지원을 받으며 한국 아이들과 미팅을 하며 유흥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지냈고, 결국 난 그곳에서 두 달을 보내고 어느 정도 일을 구하여 생활이 정착되었을 때, 플랫 메이트로 Asian Female만 원하는 베트남 이민 가족의 집에 방을 얻어 나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도 멀리하고, 한국인과 한국어도 멀리하는 생활을 의식적으로 이어나갔다. 나는 영어를 공부하러 온 것이니까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구한 파트타임은, 주중에 nursing home(양로원 같은 곳)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돌보는 일과 주말에 결혼 피로연에서의 서빙 일이었다. 오전에는 파트타임 일을 하고, 오후에는 어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주말 오후부터 저녁까지는 다시 파트타임이 이어졌다.

어느 토요일 밤, 레스토랑 매니저가 좀 더 늦게까지 일해줄 수 있냐고 해서 평상시보다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게 되었다. 마치고 나올 무렵, '차를 불러줄까?' 하던 것을, 비싸기로 악명 높은 런던의 블랙캡을 탈 엄두는 나지 않아 버스를 타면 된다고 하고 서둘러 공원을 뛰어나왔다. 내가 일하던 레스토랑은 교외 공원 안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오가며 새소리와 예쁜 꽃을 구경하는 것이 참 여유롭고 좋았는데, 그날은 미친 듯이 달려 나왔다. 온통 어두운 주변이 무서웠다. '차를 불러달라고 할걸. 그들이 계산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지만, 왔던 길을 돌아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도로에 나왔을 때는 자정이 되기 전이었는데, 참 조용한 주택가였다. 버스가 하나 오긴 했지만, 맞은편으로 가는 버스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내 쪽으로도 버스가 올 거야.' '맞은편 버스라도 타고 가서, 다른 버스로 환승했어야 했나?' '지금이라도 레스토랑으로 돌아갈까?' 머릿속은 바삐 돌아가고, 누군가가 나를 쳐다만 봐도 불안하다. '정 안되면, 걸어서 집에 가자. 내일 아침 전에는 도착하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맞은편으로 자가용이 한 대 지나간다. 차가 멈춘다. 운전자가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남성 운전자가 내린다. 운전자가 내쪽으로 다가온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하마터면 도망을 갈 뻔했다. 무서워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바로 그때, '** 자매님?'하고 그 운전자가 물어온다. 또박또박 한국어로 내 이름을 부르며?!

내가 런던에서 아는 한국인 중에, 유일하게 차를 가지고 있는 그분이, 마침 그 시간 자정 무렵에 그곳을 지나가다가 나를 알아본 것이다.(런던에 정착할 때 도움을 받은 개척 교회의 집사님. 알음알음 택시 일을 하신다고 들었다.) 나는 그때, 신은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집사님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플랫으로 돌아갔고, 그 이후 몇 번은 꾸준히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성금을 했다. 그것이 그 당시 여러 가지 면에서 여유가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감사함의 표시였다.


크리스마스에 방문한 이탈리아의 아씨시는, 어쩌면 이곳이 지상과 천상을 구분하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자욱한 기체가 아씨시 아랫마을과 아씨시를 구분하고, 드문드문 종소리가 뎅 뎅 뎅 울려온다. 성 프란체스코의 삶이 묻어 있는 이곳에서, 나는 또다시 15년 전의 그날을 생각했다. 가끔은 생각지도 못했던 도움에서, 가끔은 내 눈을 의심하게 하는 멋진 풍광 속에서, 나는 감사한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감사하는 삶 속에 신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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