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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수정 Oct 04. 2022

늘 주사기를 가지고 다니는 삶

애증의 젝스트, 언제쯤 이별할 수 있을까

알러지로 인해 아나필락시스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젝스트, 즉 에피네프린 주사기를 늘 휴대하고 다니다가 비상시에 사용할 것을 권한다. 우리 아이는 두 돌 무렵 첫 아나필락시스를 겪고 젝스트를 처방 받아 어린이집 가방에 하나, 그리고 내 가방에 하나 넣어 늘 가지고 다닌다. 혹시나 깜빡하고 놓고 나온 날에는 가슴이 철렁하고 식은땀이 난다. 그런 날은 혹시라도 아이가 뭘 잘못 먹어 아나필락시스가 오지 않을까 신경이 더 곤두선다.


젝스트를 처음 받았을 때는 이걸 사용할 일이 있을까? 절대 없어야 할텐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친구의 생우유 한모금을 무심코 마셔 입술과 얼굴이 퉁퉁 붓는 사고가 일어났다. 어린이집까지 젝스트를 들고 뛰어가서 아이를 안고 택시를 잡아 응급실로 향했다. 입술이 퉁퉁 붓고 축 늘어져 안긴 아이에게 이 젝스트, 이 주사기를 꽂아야 하는데....하는데...해야 하나? 하는게 맞는건가? 어떡하지? 애꿎은 주사기 포장지만 꽉 쥐었다 놨다 하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간호사도 의사도 아닌 일반인이 누군가에게 주사를 놓는다는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그게 내 자식이고, 지금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어떡하지 어떡하지만 반복하다 결국 응급실에 도착했다. 의사선생님께서는 "이런 경우엔 바로 주사 해주시고 데려오셔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젝스트는 일반 주사기와 다르게 생겼다. 일반 주사기보다 훨씬 더 크고 몸통이 두껍다. 주사하는 방식도 다르다. 안전캡을 제거한 뒤 주사기 몸통 부분을 손으로 감싸쥐고, 검은색 부분을 아이 허벅지에 수직으로 갖다댄 뒤 꾹 누르면 바늘이 나와 주사액이 들어간다. 실수하게 되면 이 주사기는 다시 사용할 수 없게 되므로 반드시 한 번에 제대로 주사해야 한다. 알레르기 커뮤니티에서 젝스트를 사용하다 실수로 바늘이 자신의 손을 찔러 피를 줄줄 흘렸다는 어머니의 후기도 본 적이 있다.


주사액이 남김없이 들어가도록 약 10초 동안 누른 자세를 유지해야 하므로, 주사기를 꽂은 뒤 1부터 10까지 센다.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고, 발버둥치는 아이를 몸으로 꽉 누른채 눈을 질끈 감고 숫자를 세는 그 10초는 내 인생에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지옥의 시간이다. 


젝스트를 주사하고 나면 아이의 증상은 천천히 호전된다. 쌕쌕대던 숨소리가 서서히 차분해지고, 퉁퉁 부은 입술과 얼굴도 수십 분에 걸쳐 가라앉는다. 하지만 젝스트를 사용해 잠시 나아지는 듯하다가 다시 반응이 찾아오기도 한다. 때문에 젝스트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응급실로 향해야 하고, 응급실에서 최소 6시간 정도는 지켜봐야 퇴원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아이도 장염으로 입원했다가 유당이 들어간 약 때문에 아나필락시스가 왔을 때 젝스트를 주사하고도 몇 분 후 다시 코와 입이 붓기 시작했던 적이 있다. 당시엔 병원이어서 빠르게 추가 처방이 가능했지만, 만약 집이나 다른 곳이었다면 정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젝스트를 처음 사용했던 날은 아이가 카페에서 시킨 망고스무디를 한 두 모금 마셨을 때였다. 분명 우유가 들어가지 않는다고 확인을 했건만, 알고보니 아르바이트생은 연유시럽은 우유와 다르다고 생각해 들어가지 않는다고 대답했던 것이었다. 아이는 몇 분 안에 입술이 퉁퉁 붓고 침을 삼키지 못해 줄줄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항히스타민제를 먹이려 해도 목이 부었는지 제대로 삼키질 못했고, 아이를 안고 바로 차로 뛰어가 손을 덜덜 떨며 처음으로 젝스트를 주사한 뒤 가까운 응급실로 향했다. 


이 날 젝스트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본래 진료를 받던 대학병원을 이사하면서 분당서울대병원으로 바꾼 덕분이었다. 분당서울대병원은 알레르기 교육 시스템이 매우 잘 되어있어서, 전원하고 첫 진료를 받던 날 따로 알레르기 센터에서 젝스트 사용법을 교육 받았다. 직접 만져보고 찌르는 연습까지 해보고 나니 그제서야 사용할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응급상황에서도 그때를 떠올리며 아이에게 주사할 수 있었다. 만약 젝스트를 휴대하고 다니는 분이라면, 또는 그래야 하는 아이의 부모님이라면 반드시 직접 만져보고 연습해보시길 강력히 권한다. 그럴 수 없는 경우라면 유튜브 동영상을 여러 번 보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시길 추천한다. 글, 그림으로 접하는 것과 동영상으로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지금은 젝스트 전용 파우치를 구매해서 항히스타민제와 함께 늘 가지고 다닌다. 휴대용 산소포화도 측정기도 함께 들어있다. 늘 가지고 다니지만 절대로 쓸 일 없기를 바라는 애증의 존재다.


우리집에는 지금 4개의 젝스트가 있다. 그 중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효기간이 지났다. 예전에 의사선생님께서 젝스트는 유효기간이 지났다 하더라도 주사했을 때 효과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버리지 말고 일단 가지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싱크대 찬장에, 자주 들고 다니는 가방에, 가장 자주 여는 옷장 속에 넣어두고 있다. 사고가 발생한 상황이면 경황이 없어 가장 익숙한 곳부터 손이 가기 때문이다.


처음 처방받았을때는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까지 가야 젝스트를 받을 수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대학병원 근처 약국에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알러지 인구가 점점 늘고 있어서일까. 


젝스트 없이 손바닥만한 미니백 하나만 들고 마음 편히 아이와 외출할 수 있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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