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수정 Jun 19. 2022

도시녀에게 텃밭이 생기면

바보농부들의 엉망진창 텃밭 가꾸기

초보 농부를 넘어 바보 농부 수준인 우리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 고구마 모종을 심으려고 알아보다 보니 원래 고구마인줄 알았던 식물이 뭔가 다르게 생겼다. 본래 밭 주인에게 물어보니 고구마가 아니라 비트라고 했다. 정말 자식농사랑 똑같다. 내 자식이 고구마인지 비트인지 알고 기르는 사람은 진짜 똑똑한 엄마일 것이다. 대부분 엄마가 처음이라 내 자식을 얼핏 보고 고구마라 생각하며, 원래는 비트인 아이를 고구마 열매를 기대하며 키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게 바로 문제의 비트다. 일단 뭔지는 알았으니...언젠간 비트 피클을 담글 수 있을까.

그리고 더 웃긴건 원래 고구마를 이렇게 심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밭에서 비트를 살펴보다 진짜 고구마도 섞여있다는걸 알았는데, 그냥 통으로 심겨 있었다. 원래는 고구마 순을 내서 순이 15센티미터 정도 자라면 한 마디를 남기고 잘라서 순을 심는거라고 했다.(블로그에서 10분 검색해봄). 고구마를 이렇게 심었다면 과연 비트도 올바르게 심겨 있는 것일까? 합리적 의심이 든다. 심은 사람도, 고구마인지 비트인지 몰랐던 사람도 모두 엉망진창 바보 농부들이다. 그렇지만 즐겁다.

내 텃밭을 사진으로만 보고, 내가 따온 방울토마토를 먹어보기만 하던 남편이 주말 텃밭 가는 길에 따라 나섰다. 농기구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곡괭이로 한 15분? 잔소리를 해 가며 잡초를 정리해 주었다. 군대에서 해봤다나...한국 군대에서는 정말 많은걸 하는 것 같다. 소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남편소가 와줬다. 

따라온 내 아들과 함께 밭을 관리하는 다른 엄마의 딸도 같이 왔다. 아파트 단지 내 화단은 정기적으로 소독을 해서 벌레가 많지 않은데, 이 밭에 오면 무당벌레를 하루에 족히 20마리는 잡을 수 있다. 신이 나서 무당벌레 채집을 하고, 가져온 간식을 나눠 먹는다. 귀농하면 매일매일 이런 일상일까? 사실 귀농할 필요도 없이 내가 사는 곳이 그냥 농촌인 셈이다.

개천에는 엄마 오리와 아기 오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들을 누릴 수 있음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나의 치열했던 20대에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도심을 누비던 세상 도도한 직장여성이었는데(내 생각에는 ㅎㅎㅎ)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서 인생이 재미있다더니 정말 그렇다.


과연 내년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이 밭을 그때도 내가 관리하고 있을까? 아이의 진학 방향 문제로 고민이 산더미인 요즘, 내 선택에 따라 내년의 내 모습과 길게는 수십 년 후의 내 아이 모습도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그래도 고구마면 어떻고 비트면 어떤가. 피클을 만들든 구워서 먹든, 맛있게 즐기면 그만이겠지.

작가의 이전글 도시녀에게 텃밭이 생기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