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수정 Jun 17. 2022

도시녀에게 텃밭이 생기면

뭐지 이 미친 힐링은...? 거부할 수 없는 농부 유전자 

경기도로 이사오면서도, 차로 달리면 곳곳에 보이는 작은 밭들을 스쳐가면서도 내가 농사를 짓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도 난 아이의 유아용 모래놀이 삽과 쟁기를 에코백에 넣고, 앞이 보이지 않아 잘 쓰지 않던 벙거지 모자를 쓰고 밭으로 향한다. 평생 도시에서 살거라고, 귀농따윈 내 인생에 없을거라고 굳게 믿던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걸까.

동네 친구 엄마의 주말농장을 방문했던 것은 불과 1~2주 전이었다. 친구가 분양 받았는데 함께 관리하고 있다며, 아이들과 같이 가보지 않겠냐고 해 흔쾌히 따라 나섰다.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나는 그저 루꼴라와 바질을 조금 따 와서 바질페스토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엄마가 글쎄 어린이집 원장선생님의 주말농장도 관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며 함께 하지 않겠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우리집에서 걸어서 15분이면 도착하는 거리, 게다가 개천이 바로 옆에 있어 개천 물을 떠서 주면 되는 황금입지였다. 얼떨결에 집히는 대로 아이의 유아용 모래놀이 삽과 쟁기를 유모차에 챙겨 길을 나섰다. 그렇게 나는 내 밭을 만나게 되었다.

밭을 처음 본 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잘 자란 옥수수와 토마토들이 가지런한 옆의 농장들과 달리, 방치된지 한참 되어 보이는 바싹 메마른 밭이었다. 밭이라기 보단 그저 버려진 땅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잡초가 무성히 자라 무엇이 잡초고 무엇이 작물인지 구분이 되지도 않았다.


내 밭은 아니지만 일단 가져간 상추 모종을 심기 위해 밭 두 칸의 잡초를 뽑고 갈았다. 물기하나 없어 흙이 날리는 밭이었지만, 땀을 흘리며 쟁기질을 하니 조금씩 잡초와 돌이 걷히기 시작했다. 이 날 깨달았다. "아 이래서 농사지을 때 소가 있어야 하는구나!"

가져간 상추 모종을 심고, 루꼴라도 심었다. 개천에서 물을 떠다가 주었지만 해가 워낙 쨍쨍해 금방 말라버릴 것 같았다. 과연 루꼴라 씨에서 싹이 날 것인가, 이 상추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며칠동안 일이 바빴던 나는 밭에 가지 못했다. 쨍쨍 햇빛이 내리쬐고 연일 가뭄이라는 뉴스가 나왔지만, 나는 주말농장은 정말 주말에만 가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다 영 맘에 걸려 밭에 가봤더니, 루꼴라 싹은 아주 눈꼽만큼 자라 있었고 상추는 말라죽기 직전이었다.

목말라 죽겠다는 상추의 신음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했다. 급한대로 농기구 창고에서 물뿌리개를 꺼내 개천 물을 길었다. 물을 뿌려주고 시든 잎을 따주면서 과연 이 중에 얼마나 살아남을지...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같이 밭을 갈던 동네 엄마가 말했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인 이유는 우리가 엄마이기 때문이라고. 맞다, 자식농사란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어찌나 마음이 쓰이는지 자꾸 밭 생각이 나서 다음날도 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식키우는 것처럼 농사도 치트키가 없더라. 그저 일일이 잡초 뽑아주고, 목마르면 물 줘야 하고, 지지대가 필요하면 대 줘야 하고...손이 좀 많이 가는게 아니었다.

그래도 밭에 있는 정체 불명의 잡초들을 열심히 뽑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잡초와 작물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잡초를 열심히 캐다가 이게 뭐지?하고 캤더니 감자와 고구마가 심겨 있었다. 아하...이게 고구마고 감자구나...마트에서 사먹기만 했던 나는 전혀 몰랐다. 갑자기 흙 밖으로 끌려나와 당황한 감자와 고구마를 다시 잘 심어주고 물을 주었다.

처음과 비교하면 깜짝 놀랄 정도로 제법 정리된 밭이 뿌듯했다. 물론 지나가던 농사 연륜 있어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지금은 가물어서 괜히 고생이야~비 오고 나서 해~"라고 말씀하시며 혀를 끌끌 차셨지만 그래도 "요것만 더, 조것만 더"하면서 잡초를 캐고 뽑다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뭐든 너무 열심히 한다. 아예 관심 없을 땐 몰라도, 일단 내 일이라고 던져주면 죽어라 하는 K-장녀의 막중한 책임감 덕분에 세상 우아하게 발레 수업을 듣고 난 뒤 농기구를 챙겨 밭으로 향한다. 다리가 덜덜 떨리도록 운동을 하고 밭에서 잡초 1시간 뽑고 나면 눈 앞이 노래진다. 도대체 나는 왜 이러는 것인가?

드디어 가물었던 땅에 비가 내렸다. 내 평생 이렇게 비를 기다리고 걱정했던 적이 있었던가? 밭에 물을 줘도 금방 바싹 말라버릴 정도로 뜨거운 뙤약볕에 작물이 타죽을까 노심초사했는데, 이틀간 비가 내려주니 너무나 고마웠다. 무엇보다도 비 오는 날은 물 주러 밭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잡초를 뽑고 흙을 고르다 보면 사실 엄청 힐링이 된다. 빗물을 머금어 촉촉해진 밭은 촉촉한 흙냄새에 잡초도 쏙쏙 뽑혀 힐링이 백배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귀여운 내 쟁기와 삽을 놀리고, 잡생각은 잡초와 함께 뽑아서 던져버리길 반복한다. 이래서 나이들면 귀농해 밭 가꾸며 살겠다고 하는구나, 마음이 정말 평화로워지는구나 싶다. 


하지만 쪼그려 앉아 시간가는 줄 모르다 보면 이래서 어르신들이 여름에 일사병으로 돌아가시는구나 싶다....더우니까 그만해야지 하다가도 잡초 하나만 더 이 고랑 하나만 더 하면서 끊임 없이 손을 놀리게 된다.

남이 일구다 포기한 밭이기에, 내가 심지 않아도 이미 심겨져 있던 작물들이 꽤 있었다. 잡초를 걷어내니 고추와 방울토마토, 가지, 오이, 고구마, 감자, 상추, 루꼴라....이렇게 다양한 작물이 자라고 있는 밭이 되었다.


물론 밭고랑 절반 가까이는 아직 비어있다. 뭘 심고 싶지만 그러면 물을 길으러 개천을 열 번은 왔다갔다 해야해서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6월에 심을 수 있는 모종을 검색하고 있는 나...양파를 심을까, 당근을 심을까, 옥수수를 심을까 행복한 고민 중이다.

오늘 첫 수확을 했다. 방울토마토 중에 제법 붉은 것을 4알 땄다. 잇몸이식수술한지 3일차라 나는 먹지 못하지만 이따 하원하고 오면 아이에게 "우리가 함께 물 준 밭에서 땄다"고 줄 생각이다.

비닐도 치고 옥수수가 쭉쭉 자라 있는 옆의 밭과 비교하면 초라하지만, 그래도 버려지다시피 했던 밭이 내 손길을 받아 점점 모양을 갖춰가고 있다.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촉촉한 흙냄새를 맡으며, 갑자기 흙이 파헤쳐져서 깜짝 놀라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재빨리 다시 덮어주며 홀로 집중하는 이 시간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평생 도시에서만 살 줄 알았는데, 죽을 때까지 흙 만지는 일 없이 살 줄 알았는데 산다는 건 참 모를 일이다. 고작 밭에 네다섯번 간 것 같은데 이렇게 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웃기다. 밭에 갈 때마다 이것저것 쓰고 싶은 말들이 생각나는 걸 보니...나는 역시 농부의 유전자를 물려 받은게 틀림 없다.

작가의 이전글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을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