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수정 Oct 08. 2022

너는 참 운이 좋은 아이야

내가 받은, 물려줄 최고의 유산

여유롭게 클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지만 나는 나름대로 단단한 내면의 뿌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비싼 사교육비를 들여 과외를 받거나 학원을 다녀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부모님이 평소 자주 해주시던 말, 그리고 보여주신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내게 "너는 참 운이 좋다"는 말을 자주 해주셨다. 달달 외울 정도로 자주 듣던 레파토리가 있다. "학교 입학해서 도시락 쌀 학년 되니까 바로 급식 도입되고, 중학교 갈 때 되니까 집 앞에서 학교까지 가는 버스 노선이 바로 신설되었다"는 것이다. 엄마가 나를 축복해주려고 일부러 해준 말일 수도 있겠지만, 쉽지 않던 생활이었음에도 늘 긍정적인 면을 먼저 찾아보는 엄마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녹아있는 말이기도 하다.


좀 더 큰 뒤에도 나의 행운은 계속되었다. 다른 과목은 대부분 잘했지만 수학만 유난히도 못했었는데, 수능을 보고 대학에 지원할 때가 되니 '언사외', 즉 수리를 제외한 과목들만 반영하는 전형이 생겼다. 덕분에 나는 대학교에 무사히 입학할 수 있었고, 얼마 뒤 이 전형은 사라지게 되었다.


굵직하게 떠올려 보자면 이 정도지만, 나는 항상 스스로 '나는 언제나 행운이 따르는 사람'이라는 생각하며 살아왔다. 가끔 일이 잘 안 될 때도 "더 큰 불운을 피해 이 정도인 것이 행운이다"라고 생각하며 넘겼다. 힘든 시간을 버틸 때도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행운의 시기가 올 것이라 믿었다. 왜냐하면 나는 원래 운이 좋은 사람이니까. 



남들과 다르게 알러지를 가지고 태어나서 못 먹는 음식이 너무나도 많은 우리 아들도 생각해보면 운이 참 좋다. 마침 우유, 계란까지 엄격하게 제한하는 '비건' 식단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비건 산업이 급 성장하면서 먹을 수 있는 간식들이 상당히 많아진 것이다. 요리 못하는 엄마 밑에 태어나 세상 맛있는 것들 못 먹어보고 살 뻔 했는데 이 얼마나 운이 좋은 일인가.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은 이럴 때 쓰지 싶다.


아들은 그야말로 복덩이다. 결혼하고 한 달 만에 곧바로 임신이 되었고, 다니던 직장에서 많은 배려를 해주셔서 큰 무리 없이 9개월 만삭까지 일을 할 수 있었다. 임산부였음에도 당시 배우던 벨리댄스 선생님께서 배려해주셔서 안정기부터 만삭까지 운동도 열심히 해 자연분만으로 무사히 순산했다. 아이가 역아였다가, 횡아였다가 하도 돌아서 걱정을 많이 했지만 출산 당일에 보니 다행히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또 우리 아들을 너무나 예뻐해주시는 고마운 산후도우미 이모님을 만나 미숙한 엄마가 해줄 수 없는 능숙하고 애정어린 케어를 듬뿍 받았고, 모유수유까지 적극 이끌어주셔서 돌까지 1년이나 완모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유 알러지 있는 아이인걸 그땐 몰랐는데, 모유수유 안했으면 어쩔뻔했나 싶다.


얼마 안 있어 남편도 원하던 회사로 이직해 칼퇴가 일상이 되면서 아빠의 케어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대기 걸어 둔 국공립 어린이집도 생각보다 빨리 연락이 와서 일찍부터 다닐 수 있었고, 이사해서 옮긴 가정 어린이집 원장님은 간호사 출신이셔서 알레르기 아이도 걱정 없이 맡겨드릴 수 있었다. 게다가 어찌나 정성과 사랑이 넘치셨는지 코로나로 집에 있는 아이를 위해 급식을 집으로 손수 가져다 주실 정도였다. 지금은 가정어린이집을 무사히 졸업하고 집 바로 앞에 있는 민간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담임선생님과의 커뮤니케이션과 엄마의 도시락으로 2년째 아나필락시스 사고 없이 무사히 다니는 중이다. 


아이의 알러지 덕분에 교육과 미래에 대한 설계도 다양한 방향으로 고민해보게 되었다. 알러지가 없었다면 당연하게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를 보내고 대입을 고려한 플랜을 세웠겠지만 지금은 아이가 훗날 해외에서 살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교육의 방향을 여러가지로 고심하고 있다. 아이의 알러지를 알게 된 캐내디언 이웃으로부터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캐나다를 비롯한 다른 나라들의 알러지에 대한 배려와 아나필락시스 상황 발생 시의 대처 환경에 대해 전해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거의 모든 식당에 알러지 혹은 비건 옵션이 있다는 점, 학교 선생님들은 의무적으로 1년에 한 번씩 아나필락시스 사고 시 에피네프린 주사 사용법 및 알러지 아이 케어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는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의 환경이 그만큼 갖춰지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내 아이와 같은 아이들의 알러지 사례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아이가 좀 더 나은 환경을 누리게 해줄 수 있도록 보다 폭넓게 미래를 모색하게 되었다. 먼 미래에 아이가 "오히려 그때 알러지가 있어서 운이 좋았다. 덕분에 남들과 조금 다르게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래, 너는 운이 좋다. 여러 차례 위험한 상황을 겪었지만 그 때마다 잘 넘기지 않았니. 저마다에게 주어진 고생의 양이 있다면, 너는 초년에 그 고생을 많이 소진했으니 앞으로는 순탄할 수 있을거야. 그리고 네 인생에 어쩌면 가장 위험하고 힘든시기를 엄마 아빠가 네 옆에 있을 때, 젊고 힘이 있을 때 함께 겪을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작가의 이전글 우유 먹는 연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