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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수정 Oct 08. 2022

상대적인 불행

그 정도면 괜찮네

불행과 힘듦은 상대적인 경우가 많다. 내가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조건이 한없이 우쭐하게 느껴질 수도, 반대로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알레르기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흔하디 흔한 식품이자 수많은 음식에 깨알같은 성분명으로 첨가되는 우유, 계란조차 조심해야 하는 아들과 우리 가족은 상대적으로 힘들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의 대부분이 우유, 계란 알레르기를 가진 나라에서 산다면? 그다지 불행하다거나 힘들다고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그런 환경이라면 대부분의 식품에서 우유, 계란 성분이 배제되어 있을것이고 훨씬 안전할테니까.


얼마 전 대학병원 진료를 갔을 때 교수님께서 "아이가 우유, 계란 말고 다른 알레르기도 있나요? 견과류 같은?"하고 물으셨다. 개털 이외에는 아직까지 견과류 등에서 반응이 나타난적은 없다고 하자 "그럼 괜찮네~"하고 말씀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선생님께는 전국의 심각한 알러지 어린이들이 찾아온다. 우유, 계란두 개 뿐이면 양호한 축에 속한다. 밀 알러지, 쌀 알러지, 소고기 알러지 등으로 고생하는 아이들도 있고 수십가지 알러지를 가진 아이도 있으며 알러지 반응의 정도가 우리 아이보다 훨씬 심각한 아이도 있다. 적어도 '이 교수님께 진료 받는 아이들'이라는 그룹 내에서는 내 아이는 상대적으로 매우 양호한 편이고, 덜 고생스러운 편인 것이다.


나도, 남편도 우유나 계란 알러지가 없었고 주위에서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아이 알러지를 알게되고 아나필락시스 진단을 받았을 때는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이 아이를 어찌 돌봐야 하나 막막하고 혹시나 아이가 모르고 음식을 접해 아나필락시스 쇼크가 올까봐 늘 가슴이 두근거리고 배 한가운데가 싸르르 아팠다.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해 정말 처음이니, 어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 갑자기 엄청 깊이 움푹 파인 구덩이에 빠져 버린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알러지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다  '세이프 알레르기'라는 커뮤니티를 알게 된 뒤, 생각보다 아이의 알러지로 고생하는 엄마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서 이 길을 걸어간 선배들이 축적해둔 데이터 덕분에 아이에게 먹일 수 있는 음식을 찾거나, 우유 아나필락시스 아이가 조심해야 하는 약 등 병원에서 알려주지 않는 너무나 귀한 정보들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크게 얻은 것은 이미 같은 마음고생을 겪은 선배맘들의 가슴아픈 경험담과 나름의 대처 노하우, 그리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힘듦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데서 오는 일종의 '안심'이었다.


아이가 크고 나름 조심하는 생활이 습관화되어 큰 사고 없이 지내는 요즘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물론 완전히 편안하거나 긴장을 풀 수는 없다. 그렇지만 더 이상 "왜 내 아이에게 이런 알러지가 생겼을까"라는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거나, "앞으로 알러지가 안 없어지면 어떻게 하지"라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고민으로 가슴을 치지 않는다. 그냥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상황에 맞게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며 담담히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려 한다. 물론 이런 평화는 이러다 한 번이라도 알러지 이벤트가 생기면 힘없이 깨어져버릴 살얼음 같은 것이긴 하지만.


'불행'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 순간 그것은 불행이 된다. 그냥 내 아이가 알러지가 있다는 사실, 남들이 너무나 자주 먹는 음식을 못먹는다는 것은 '사실'이고 '특징'일 뿐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에 맞는 길을 걸어가면 된다. 


어차피 사람마다 걷는 길은 다 다르니까. 꼭 남들이 가장 많이 걷는 큰 길로만 걸어가야 하는건 아니니까. 남들이 잘 모르는 좁은 길을 걸으면서 행복을 찾는 삶도 충분히 좋은 삶이 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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