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와 권리 사이
배려를 기대하며 살면 상처만 늘어난다
결혼식을 마치고 고대하던 식사시간, 한 테이블에 우리 가족과 동생네 가족이 앉았다. 우리 아이는 여섯살 남자아이, 동생네 아이들은 일곱살과 다섯살 남자아이들. 셋이 꽁냥꽁냥 잘 노는 모습이 귀엽지만 때론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활발하다.
그런데 손님들에게 인사드리고 오니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갔다고 했다. 동생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보채자 제부가 뷔페 아이스크림을 가져다 줬는데, 우유가 들어있어 그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없던 우리 아들이 아빠를 조른 것이다. 남편이 편의점을 샅샅이 뒤졌지만 우유가 들어가지 않은 아이스크림은 홍차가 들어간 아이스바 뿐이었고, 나는 그마저도 혹시나 알러지 반응이 올까 싶어 아이에게 한 입만 먹고 지켜본 뒤 괜찮으면 더 먹으라고 했다. 아이는 한 입 핥아 보더니 맛이 없다며 먹지 않겠다고 했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전성분에 우유가 들어있지 않다고 되어있더라도 알레르기 반응이 오는 경우가 많고, 특히나 아이스크림 같이 차가운 음식은 반응이 더 세게 오기 때문에 나는 한동안 긴장한 채 아이에게 두드러기가 올라오지 않는지 기침하지 않는지 마음 졸이며 지켜봐야 했다.
제부는 자주 만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아이의 사정을 잘 모를 수 있다.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금세 사라질 수준이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아직도 그래요?"하고 남편에게 물었다고 했다. 남편은 우리 아이가 먹을 수 없는데도 눈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아이들에게 갖다준 제부가 내심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니 더 배려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 수 있다. 아이가 상처 받아 시무룩해 하는 표정을 보는 것은 마음이 많이 아픈 일이다.
그렇지만 내 아이가 알레르기가 있으니 배려해달라고 누구에게나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배려해주는 것은 그들의 호의이고 감사할 일이지만, 배려를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상처 받는 것은 고스란히 아이와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알레르기에 대해 배려를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도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서운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그렇게 느낄 것이고, 자신이 못 먹는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남들은 먹더라도 나는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일상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겪게 될 일일테니까.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배려가 우리가 마땅히 누릴 권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아이의 몫, 그리고 아이를 지키는 것은 부모인 우리의 몫이라고 한정해야 사고 없이 안전하게,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고 아이를 지킬 수 있다.
때때로 알레르기에 대해 누군가가 묻는 말들, 해주는 조언들에 내가 상처를 받을 때가 있다. 사실 그 상처가 꽤 오래 이어져 한동안 우울의 늪에 빠져있을 때도 많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집에 혼자 남아 울기를 몇 주나 한적도 있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그 말을 한 상대방에 대한 서운함보다는, 그 모습에서 지난 날 내가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했을 무심코 건넨 말들이 얼마나 폭력적이었을지를 깨닫는 것이 더욱 괴롭다. 말 한 마디 한 마디 조심해야겠다, 아니 차라리 말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면 내가 했던 말을 곱씹어보며 내가 또 누군가에게 상처 될 말을 하진 않았나, 또 나의 못남을 드러내진 않았나 한없이 복기하게 된다.
아무튼, 우리 아이는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결국은 우울한 방향으로 수렴하게 되어있다. 내가 단단하게 다져놓은 마음 위에서 아이가 가볍게 뛰어놀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