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주의자의 사생활
마침내 회사를 관둬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변심하기 전에 사표를 써서 책상서랍 안에 넣었다. 이제 언제 사표를 던질 것인가만 남은 것이다. 가급적이면 코너에 몰려 도저히 빠져나가기 힘든 일진이 사나운 날, 카운터펀치처럼 일격을 날리리라 생각했다. 참고 참았던 월급벌레의 수모를 단 한 번에 갚아주는 방법이 통쾌하게 사표를 던지는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럴려면 사표 이후의 튼튼한 대책이 확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구인이 회사에 사표를 내는 이유는 천 가지도 넘겠지만, 대개는 원치 않는데 어쩔 수 없이 내는 경우가 가장 많을 것이다. 물론 충동적으로 사표를 쓰는 경우가 늘고 있다지만, 그 충동의 밑바닥에는 불만과 노여움과 상처받은 자존심이 켜켜이 쌓여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구상의 모든 사표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이고,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표이고, 제발 한 번만 살려달라는 애원이기도 하다.
나는 사표를 낼 때 언제나 당당했다. 더 나은 대책을 세우고 사표를 쓰는 신중한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갈 곳이 모호했다. 회사를 옮겨가기 위한 사표가 아니라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모험을 감행하는 어드벤처 입장권 같은 사표였다. 창업은 세상에서 가장 불안하고 열악한 조건으로 창업자를 고용한다. 어떤 실체적인 지위나 보상은커녕 생사를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인 인생을 위한 사표가 내 책상 서랍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때 아닌 방황의 시간이 내게 찾아왔다. 수많은 성공 자기계발서에는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낯선 것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정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뜨거운 열정과 담대한 용기가 성공의 열쇠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그런 멋진 말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걸 누구나 다 알게 된다. 혼자 나서는 길은 막막하고 두렵고 외롭다.
나는 나를 챙기고 준비했다. 눈치 보지 않고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했다. 사표를 품고 있으니 그렇게 해도 마음이 편했다. 예전처럼 회사 일에 죽을 둥 살 둥 목매달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더 높은 자리와 더 많은 월급을 위해 인사고과와 매출수치에 매달려 밟아대던 과속 액셀에서 발을 뗀 것이다. 마음을 비우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게 조금이라도 유리하고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처리했던 일들을 동료나 부하직원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처리하고, 애착을 보였던 프로젝트도 더 잘 할 것 같은 후배에게 흔쾌히 넘겨줬다. 상사를 대할 때도 평가자, 감시자가 아닌 나보다 더 고생해서 저 자리까지 올라간 선배로서 연민과 존중의 마음을 갖고 대했다.
더 이상 사장 앞에서 주눅 들 필요도 아부를 떨 필요도 없었다. 간부회의에서도 문제점에 대해 눈치만 살피고 있는 부서장들을 대신해 거침없이 내 의견을 피력했다. 어떤 일들에서 내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지가 보였고, 편견과 사심을 가지고 처리했던 불공정한 일들이 객관적으로 보였다. 나는 균형 잡힌 시각으로 문제점을 보완했고, 대안을 제시했다. 사사로운 개인의 관점이 아니라 기업의 존재 이유와 사회에 대한 기여의 차원에서 의미 있는 일인가를 생각하고 처리했다. 관성적으로 수행해왔던 일들을 내가 경영자라는 생각으로 바라보고 결정했다.
나는 나의 유능함을 되찾아 갔고, 부하들에게 잃었던 존경을 되찾았고, 상사에게 인정받는 리더십을 발휘하게 되었다. 멋지게 사표를 던지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뿐인데 나는 점점 쓸모 있는 인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회사에서는 쿨하고 유능하고 긍정적인 회사원으로, 퇴근 후에는 내 회사를 구상하고 세우고 허물고 다시 짓는 희망찬 경영자의 삶을 살았다.
그리하여 통쾌하게 사표를 던지려던 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회사가 붙잡고 동료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한없이 미안스런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굽신굽신 사표를 내밀어야 했던 것이다. 나는 안다. 사표를 던지는 일은 어쨌든 누구에게나 힘들고 외롭고 곤혹스러운 일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