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에게 드리는 충고
존경하는 선배님, 자뻑인 줄 알면서 돌직구를 날립니다.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걸 날리는 순간 그 짱돌이 누군가의 선배인 제게 부메랑처럼 날아들 것이란 것을. 그래도 제가 감히 충고를 날리는 이유는 선배나 저나 점점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나이에 들어섰기 때문이고, 심장도 뇌도 육신도 점점 딱딱하게 메말라 가는 나이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꼰대'라는 소리는 듣지 말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지요.
1. 왜 자주 전화 안 하느냐고 핀잔주지 마세요. 후배에게도 후배의 사생활이 있답니다. 필요할 때만 전화 하냐고도 하지 마세요. 아직 선배가 쓸모 있는 존재라는 증거니까 서운해 하지 마세요. 오히려 고마워하고 다행스러워하시면 됩니다.
2. 이젠 기다리지 마세요. 기다리는 모습은 젊었을 때나 아름답지 나이들어 기다리는 모습은 추레합니다. 자식도 후배도 친구도 기다린다고 전화하거나 찾아오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젠 선배가 먼저 전화하셔서 보고 싶다고, 만나자고 해야 합니다. 시간은 선배가 훨씬 더 많고, 선배는 충분히 만나자고 할 권리가 있습니다.
3. 객기 안 부리셔도 됩니다. 밥값, 술값, 찻값, 언제나 선배 혼자서 다 내려고 하지 마세요. 밥값이나 찻값 정도는 후배가 낼 수 있도록 양보해주세요. 입 대신 지갑을 열려는 자세는 정말 높이 평가합니다. 이젠 입보다 귀를 더 크게 여실 때 맞습니다.
4. 눈물 글썽이셔도 됩니다. 창피해 할 필요 없습니다. 선배의 험난한 인생역정사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다만, 레퍼토리 좀 다른 걸로 바꾸시던지 각색 좀 새롭게 해주세요.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젠 그 추억이 선배 것인지 제 과거인지 분간이 안 될 지경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 그거 인간답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5. 책을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없는 게 무언지 아세요? 책 읽을 시간이 없는 어른입니다. 30분만 같이 얘기해보면 금세 그 사람의 바닥이 드러나더군요. 책을 읽는다는 건 시대를 산다는 것이고, 세상사에 개입한다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가진다는 것이잖아요. 어떤 책을 흥미롭게 읽었노라고 말할 때 선배가 그토록 근사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선배에게서 선배만의 균형 잡힌 생각을 들을 때 자주 만나고 싶어집니다.
6. 회사에 올 때 등산복 같은 옷 좀 입고 오지 마세요. 곧 명퇴하고 산으로 떠날 것 같아서, 취미와 업무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불길하고 불안합니다. 점심 먹고 배 나온다고 바지 후크 좀 풀고 다니지 마세요. 허릿단을 늘리시던지 헬스장 가서 몸 좀 만드세요. 담배냄새, 술냄새 풍기지 마시고 멋지게 차려 입고 다니세요. 여자만 화장해야 하는 거 아닙니다. 나이들수록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아야 합니다. 선배의 내면처럼 그런 중후하고 격조 있는 모습이 외양에서도 보이면 좋겠습니다.
7. 순박하기를 바라진 않습니다. 자식 자랑, 주말농사 자랑, 백두대간 종주 자랑 좋습니다. 행복해 보여서, 선배다워 보여서 참 좋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만 입니다. 사 둔 땅 값이 또 올랐다느니, 상속받을 유산이 얼마라느니, 몇 백만 원짜리 와인을 마셔봤다느니, 친구가 총장이 됐다느니 그런 건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너무 속물스럽고 선배 이미지 제고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8. 체통을 지키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부 하는 일이나 정치권 돌아가는 꼴이 영 마뜩치 않은 것 잘 압니다. 그렇다고 싸잡아 고래고래 쌍욕부터 날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지적 수준이 훨씬 높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들처럼 우리가 괴물이 될까봐 걱정 됩니다. 선배의 식견으로 냉철한 비판의 말을 조근조근 들려주세요. 낮고 조리 있는 선배의 고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돼 있습니다.
9. 밥 먹으러 갈 때 메뉴, 먼저 정하지 마세요. 한 번쯤 후배들에게 물어봐 주세요. 선택권도 줘보세요. 선배에게 묻거든 새로 개척한 맛집에 데려가 주세요. 새로 시작한 도예 강습과 새로 시작한 숲해설사 공부에 대해 들려주세요. 나는 아직도 모험 중이고 나는 아직도 설레고 있다고. 거추장스러운 권위를 내려놓은 대신 나를 위한 선택권을 늘려가고 있다고. 선배의 진취성과 탐구심을 보여주세요.
10. 이젠 근엄의 딱지를 떼어 낼 때입니다. 나이들수록 엄숙과 체면이 선배 얼굴에 달라붙을 겁니다. 아이와 장난치던 시절을 떠올려 보세요. 유머를 잃지 마세요. 집에서 애교도 떠시고 싫더라도 번개모임 같은 것도 나가세요. 인문학 강연도 나가보시고 전시회도 가보세요. 제발 가장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지 마세요. 제발 가장 빨리 회사에 오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