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요한 날에 읽은 영화들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사랑은 내게 없었다."
사랑했던 여자가 복사꽃 흩날리는 창가에서 아득하게 말했다. 놓쳐버린 뒤에 나는 사랑을 찾으러 갔다.
"같이 있지는 못해도 잊지는 말자."
그녀가 촛불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나는 복사꽃 피는 철이 오면 그녀가 있는 쪽을 향해 그리움을 내걸었다. 나는 사막을 제대로 구경한 적도, 하늘이 변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는 수년이 지나 그녀가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그녀가 남긴 취생몽사라는 술을 마셨다. 모든 기억을 잊게 하는 술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실수록 그녀 생각이 더 또렷해졌다. 그녀가 내게 남긴 애잔한 농담이었다. 나는 그녀가 죽은 백타산으로 가서 서쪽에서 가장 독한 사내가 되어 살았다. 사랑은 살생하지 않으나 사랑을 품은 사람을 말라죽게 만든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東邪西毒을 요약하면 이렇다. 사랑을 잃고 쓴 모든 시들은 아름답다. 물러나는 사랑은 피를 토하듯 가장 요염한 시를 남긴다. 이별은 여러 가지 형태의 삶을 남긴다. 사랑할 때보다 오히려 더 맑게 사랑을 바라보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에 구양봉이라는 전설적인 협객이 나온다. 그를 서독이라 부른다. 그가 사랑했던 여자는 자신의 형수가 되어버리고, 그는 견딜 수 없어 황량한 사막으로 가 객잔을 차리고 풍운아가 된다.
그는 술회한다. 천하를 얻으려면 사랑을 버려야 하는 줄 알았다고. 누구나 산을 보면 그 너머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한다. 막상 산 너머에 가보면 별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차라리 여기가 낫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그걸 알아챌 때는 이미 늦다. 무엇인가를 위해 다른 무엇을 버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자들은 뼈저린 비탄을 살아가게 된다. 사랑에 있어서 늦은 깨달음은 무용하고, 참으로 쓰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