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농부 흉내를 내는가
"감정을 느끼면서도 행동하지 않으면 영혼이 파괴된다." 사막의 아나키스트로 불리는 에드워드 애비가 한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은 그 행동이 각자가 선택한 방식대로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내가 취하는 형태의 행동이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매도하지 말아야 한다.
수년에 걸쳐 밭작물을 키워내는 나의 어설픈 노동은 여가 활용이나 취미 활동의 일환이 아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버는 일이 나쁜 건 아니지만 회사에서 돈을 벌면서 점점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고 자본으로부터 착취당하지도 말고 지구를 엉망으로 만들지 않고 자신을 고립시키지도 않으며 미래와 함께 살아가는 길을 모색해보려는 어떤 간절함이 나를 흙으로 이끌었다.
나는 내 생산물을 통해 아득한 시절, 부족사회의 근간이었던 아주 작은 호혜적 삶을 흉내낸다. 부족사회의 전통에 나의 노동을 연결지어 그 의미를 한껏 치켜세운다. 내 비싼 노동력의 투입에 느리고 거친 소출이라는 마이너스 경제관념에 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돈의 만능적 구매력에 쉽게 굴복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자급자족했던 부족사회에서는 가난하거나 굶주리는 사람이 없었다. 어려울 때는 다 같이 나누고 함께 고생하기 때문이다. 자급자족 경제의 핵심은 호혜와 선물이다. 내가 주면 상대방도 나에게 준다. 경제 개념이 있었다면 이것이 기본 원리다. 부족사회는 못 받는 사람이 없도록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를 다스리는 윤리규범을 만들며 성장했다. 호혜주의는 부족사회의 유대를 강화하는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자본주의는 이 삶의 근본 원리를 이윤이라는 괴물에게 팔아버렸다.
내가 읽은 어떤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옥스퍼드 대학의 첫 경제학 수업 시간. 한 교수가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채 들어서며 학생들에게 물었다. "이 커피가 보이나?" 학생들은 당연히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수의 다음 말은 학생들의 경제학 수업에 대한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커피는 보이지만, 과테말라 농장도 보이나? 유럽연합 관세는? 커피 노동자들의 급여 명세서는?"
이 지구상에 없어도 좋았을 것들이 생겨나버렸다. 우리가 겪는 부당하고 부조리한 것들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체제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해서는 안 된다.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삶이 어디서 왔는지 찬찬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래야 나의 삶, 나의 행동도 이해받고 존중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