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당신의 원고는 유혹하지 못하는가
“정중한 검토를 바랍니다.” 라는 투고자의 메일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왜 잘 부탁한다거나 잘 살펴봐 주면 고맙겠다고 쓰지 않고 정중하게 검토해 달라고 할까? ‘정중한’의 의미는 내 원고를 꼼꼼하게, 끝까지, 정성껏 읽어달라는 간곡한 마음을 담고 있을 것이다. 또한 ‘내 원고’는 오랜 시간을 공들여 쓴, 독자들에게 매우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는, 어쩌면 희대의 베스트셀러가 될지도 모를 귀한 작품이니 가벼이 여기지 말아달라는 요구도 내포돼 있을 것이다.
투고자의 시간과 에디터의 시간은 다르다. 수많은 투고자가 보내오는 원고는 그에게 절절한 인생이지만 에디터에게 그것은 노동이고 짐이다. 당신은 당신의 노력과 시간을 들여 원고를 썼을 것이다. 에디터는 밥을 벌기 위해 자신의 노동과 시간을 팔아서 당신의 원고를 볼 것이다. 당신은 알고 있지 않은가? 돈을 내고 친구들과 춤을 추러 클럽에 간 사람의 시간과 돈을 벌기 위해 짙은 화장을 하고 무대에서 춤을 주는 사람의 시간의 차이를.
나는 일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에디터는 당신의 원고를 당신이 요청한대로 정중하게 끝까지 다 보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이것은 실화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전략이 필요하다. 에디터의 관심을 끌어낼 방안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보낸 원고를 상영 전의 영화 필름이라고 생각해 보자. 관객은 아무 내용도 모르는 당신의 영화를 돈 주고 보기 위해 표를 끊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렇듯이 예고편을 확인하고 영화를 볼지 안 볼지 선택할 것이다. 예고편만 봐도 재미있는지, 내 취향과 맞는지 판단할 수 있으니까. 에디터도 마찬가지다. 예고편을 보고 당신의 원고를 휴지통에 버릴지, 만나자고 답신을 보낼지 판단을 내린다.
당신은 당황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한 번도 출판사에 예고편을 따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라. 당신이 보낸 원고의 제목과 목차, 머리말이 예고편에 속한다. 어떤 신끼가 뻗친 에디터는 당신이 보낸 메일의 “<여자와 소통하는 대화법> 원고를 투고합니다”라는 제목만 보고도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에게는 원고의 제목 하나가 예고편인 것이다. 예고편은 맛 뵈기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완결된 전체의 함축이다. 물론 본문 내용은 뼈와 살이다.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부분의 투고자들은 본문에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자신의 원고가 매우 훌륭하다고 여긴다. 문제는 투고 과정에서 생긴다. 투고자의 욕구와 에디터의 이해가 다르고, 투고자의 관점과 검토자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간과한다.
검토 단계에서 주로 외면당하는 원고의 대부분은 본문에 들이는 정성만큼 제목과 목차, 머리말에 신경을 쓰지 않은 원고들이다. “초고라서 제목이나 목차는 대충 달았어요. 편집자님께서는 신과 같으시니 나중에 멋지게 고쳐주세요. 머리말은 원고를 보시면 알 것 같아서 지금은 쓰지 않았어요.” 이런 마음으로 접근하면 당신의 원고가 그 위대한 편집자님으로부터 교정 받을 기회를 가질 확률은 0.001%이다.
제목 하나만 해도 에디터에게 너무나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원고의 전체 내용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이 원고의 독자 대상이 누구인지, 어떤 장르의 원고인지, 주제에 거시적으로 접근했는지 미시적으로 접근했는지, 시류에 편승한 것인지, 화제성 있는 이슈를 다룬 것인지, 개인적인 신파를 드러낸 것인지 다 보인다. 책은 결국 미디어 매체이므로 신선한 재료로 요리한 것인지 한물 간 식상한 재료로 연출한 것인지의 매력도를 따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제목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 모든 책들의 제목도 생물처럼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음식의 맛은 목차의 배열에서 더욱 확연해지고, 요리사의 수준은 머리말에서 확인 사살 된다. 에디터들은 출판시장에서 밥을 버는 전문가들이라서 제목과 목차만 봐도 관객이 얼마가 들지 수지타산이 맞을지 촉으로 가늠할 수 있다. 본문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머리말에서 글쓰는 역량이며 문장력이 충분히 검증된다. 기본기가 돼 있는 투고자라면 본문의 방향이 어긋난 경우라도 에디터는 관심을 둘 것이다. 만약 에디터에게 투고자 상황에 적합한 집필 아이디어가 있다면 역으로 에디터가 제안 메일을 보낼 것이다.
나는 어떤 예고편을 보여주고 있는가? 낯선 사람의 시간과 인내를 붙들고 구구절절 내 인생을 다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영화가 그렇듯이 인생의 한 단면을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자. 예고편의 목표는 유혹이다. 어떤 관객은 화려하고 강렬한 영상에 끌리고, 어떤 관객은 진중하고 담백한 스토리에 끌리고, 어떤 관객은 고음보다 중저음의 배우에게 끌린다. 다 유혹할 수는 없다. 유혹의 대상을 정했다면 다른 유혹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감독이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는 예고편에 끌리면 어떤 도도한 에디터도 극장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이다.
매력적인 사람은 상대방에게 정중함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압도한다.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