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주의자의 사생활
양희은이 부르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라는 노래에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가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것은 참 쓸쓸한 일인 것 같다고도 했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랑은 알다가도 모를 일임에 틀림없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 어디 사람을 사랑하는 일뿐이겠는가.
어렸을 적, 한동네 살던 명숙이네 엄마는 길에서 나를 만나면 항상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우리 태주는 어매가 좋으노, 아배가 좋으노?"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왜 명숙이네 엄마는 내가 양친을 다 좋아할 수 없게 만드는 저토록 위험한 질문을 하는 것일까? 어떻게든 두 분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명숙 아줌마의 저의는 무엇일까? 왜 '남의 태주'를 한사코 '우리 태주'라고 부르는 걸까? 지금도 나는 아버지와 명숙 아줌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을 완전히 떨쳐버리진 못했다.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 또 있다. 나는 형제 중에서 가장 얄망궂었는데, 그것은 지독히 전근대적이고 엄격한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때문에 일부러 그런 측면도 있었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강렬한 햇빛 때문에 방아쇠를 당겼듯이 그날 나는 너무나 심심하고 무료해서 사고를 칠 수밖에 없었다. 골목길에 멀쩡히 서 있는 육중한 오토바이를 동네 조무래기 친구들과 힘을 합쳐 밀어 넘어뜨렸다. 나는 주동자였고 이유가 있었다.
오토바이는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고 사이드미러가 깨지고 손잡이 한쪽도 부서졌다. 현장에서 오토바이 주인에게 체포된 우리는 유치장에 가거나 부모님을 불러 손해 변상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오토바이 아저씨의 험악한 표정에 짓눌려 아이들은 하나둘씩 아버지들을 부르러 갔다. 그러나 나는 유치장에 가서 콩밥을 먹겠다고 버텼다. 아저씨는 어이가 없는지 니가 뉘 집 아들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버지가 없다고 또 버텼다. 그러나 겁에 질린 아이들이 저기 감나무집 아들이라고 불어버려서 나는 금방 신분이 들통나고 말았다.
부모들이 사건 현장에 모여들었다. 뒤늦게 도착한 아버지는 어찌 된 일이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있는 사실 그대로 말씀드렸다. 오토바이가 뙤약볕에 외발로 서 있는 게 너무 힘들어 보여서 쉬게 눕혀주려고 그렇게 한 거라고, 내가 그러자고 한 것이니 친구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나는 맞아 죽을 각오를 했다. 벼락이 칠 줄 알고 눈을 감고 아버지의 처분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내게 걱정하지 말라며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그리고는 오토바이 아저씨에게 내가 다 변상할 테니 아이들을 용서해달라고 고개를 조아리셨다. 그렇게 그 일은 잘 무마 되었다.
이후 아버지와 나는 그 일에 대해서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왜 그날 아버지는 내게 불호령을 내리는 대신 괜찮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지금도 나는 알 수 없다. 오토바이에게 동정을 베풀었기 때문인지, 내 책임이라고 말했기 때문인지. 그도저도 아니면 명숙이네 엄마와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 내가 의혹을 품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이제 와서 굳이 지나간 진실을 알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명숙이 아줌마를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전히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