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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팥빙수가 죽도록 싫다

명랑주의자의 사생활

by 림태주




입이 무거운 친구 정환아, 너에게만 터놓고 얘기한다. 혹시라도 이 뒷담화가 덕선이 귀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 또 조심하여라. 덕선이가 안다는 것은 온 동네 강아지까지 다 알게 된다는 것이니 꼭 명심하기 바란다. 내가 이런 하소연하는 게 참 남우세스럽고 없어 보여서 그러는 것이니 너는 입에 자물쇠를 채우기 바란다.

오늘은 땡볕이 쇠불알 늘어지듯 내리 쬐더구나. 한낮에 외근 나갔다가 지하철 역에서 사무실까지 복귀하는 길이 산티아고 순례길의 고행과 다르지 않더구나. 그늘만 골라 걸어 보려고 했으나 이 삭막한 도시에는 태양을 피할 그늘이 당최 없더구나.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걷는데 웬 카페들은 그리 많은지 시원한 팥빙수 그림이 유리창에 더덕더덕 달라붙어 나를 유혹하더구나. 친구야,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가까스로 돌려 적군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결연히 팥빙수를 외면하였다. 설마 내가 팥빙수 한 그릇 사 먹을 돈이 없어서 그랬겠느냐? 나는 팥빙수가 죽도록 싫다.

저번에 동룡이가 오랜만에 연락해서는 내가 이번에 새로 낸 책 <그토록 붉은 사랑>을 한 권 보내달라고 하더라. 요즘 형편이 어려워서 내 책을 못 샀다고 미안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어디 선물할 일이 있어서 그런가보다 싶어 나는 내 책을 사서 정성스럽게 사인까지해서 동룡이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날 나는 차마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고야 말았구나. 동룡이가 지네 사무실 여직원들이랑 떼거리로 카페에 앉아서 화기애애하게 팥빙수 처먹는 사진을 페이스북에 똬악 올려놓았더구나. 사진 아래 댓글에는 우리 팀장님 최고라고 여직원들이 폭죽이 터지는 이모티콘으로 도배를 해뒀더구나. 동룡이가 그 비싼 팥빙수를 사정없이 쐈으니 아무렴 최최고였겠지. 그날 나는 안중근 의사처럼 결연히 결심했다. 올 여름이 아무리 푹푹 찌고 염병하게 더워도 팥빙수는 물론 팥자 들어가는 어떠한 것도 절대로 입에 대지 않기로.

정환아, 오해하지 마라. 나는 동룡이를 여전히 좋아한다. 이쁜 여직원들에게 팥빙수 쏠 돈은 있어도 내 책 한 권 살 돈이 하필이면 없는 것이 월급쟁이들의 비애 아니겠느냐. 나는 걔네 여직원들의 이쁨을 저주할 뿐 결코 동룡이의 간사함을 증오하지 않는다. 정환아, 너 상상임신이란 말 들어봤느냐? 나는 오늘 팥빙수 한 대야를 상상탐식했단다.


정환아, 너는 입이 무거우니까 나의 이 억울하고 답답한 심경을 다른 친구들에게는 결코 발설하지 마라. 너나 나나 싸나이 체면이 있는데 쪽 팔까 저어된다. 친구야, 다시 말하지만 나는 정말로 팥빙수 안 좋아한다. 그런데 궁금하구나. 동룡이가 쏜 그 팥빙수, 정말 맛이 최고였을까?


{진석아, 광철아, 너희들 이름이 세상에 알려질까봐 응답하라1988의 정환이, 동룡이 이름으로 대신 썼으니 양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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