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주의자의 사생활
여름철에는 원고 청탁을 받지 않는 게 상책이다. 나는 어떻게든 쓸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 어렵사리 거절에 성공한다. 여름에 원고를 쓰는 일은 정말 거지 같다. 이를 알고 청탁하는 입장에서도 청탁술이 진화한다. 여름 원고를 봄에 일찌감치 청탁해 두거나 연간 계약으로 주기적으로 쓰게 묶어둔다.
원고 쓸 일이 없다고 방심하고 있다가 폭염에 두 개의 마감 날짜를 독촉받고 보니 입원하기 일보 직전이다.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돋는다. 누구든 건드리면 사정없이 찔러버릴 것 같다. 몸가짐을 조심하자, 오늘만 잘 넘기자.
한 매체의 주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받기를 망설였다. 또 청탁이란 말인가. 주저하다가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다행히 청탁 전화가 아니었다. 저번 달에 써보낸 원고의 고료를 지급하겠다고 계좌번호를 알려달라는 전화였다. 나는 원고료를 받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그랬더니 원고료 지급은 원칙이라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이것봐라! 나는 지기 싫어서 원고료를 보내면 앞으론 원고 청탁을 안 받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원칙을 무너뜨리는 필자의 원고는 앞으론 싣지 않겠다고 저쪽에서 더 세게 나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계좌번호를 불러주고 말았다.
도움을 많이 받은 매체라 고마운 마음에 원고를 써줬을 뿐인데, 좋은 매체는 항상 반듯하고 아름다운 원칙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나쁜 매체들의 꾐에 빠져 나는 또 한여름의 원고 청탁에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나의 유약함이 참으로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