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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에는 입을 맞추는 거얌

명랑주의자의 사생활

by 림태주


입추가 와서 나는 꽃니미에게 입맞추자고 덤볐습니다. 앗 뜨거! 뺨만 맞았습니다. 입추가 그 입추가 아닌 모양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꽃니미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나는 사시사철 꽃니미가 좋은데 꽃니미는 나를 철없다고 꾸지람 합니다. 나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까닭에 누구보다도 철든 남자라고 자부합니다. '철들다'라는 말은 '계절의 흐름을 알듯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하는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나입니다.


옛 어른들은 얼마나 슬기로웠던지 태양력을 이용해 24절기를 만들었습니다. 농사는 자연의 변화에 따르는 일이니 계절마다 기후의 변화를 읽어내고, 그에 맞춰 씨를 뿌리고 기르고 거두는 일을 해낸 것이죠. 까닭에 철들었다, 철을 안다는 말은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사람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안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싸대기 맞은 기념으로 가을의 절기를 읊어봅니다. 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 놀랍게도 이 명칭에는 일기의 추이가 간명하고 특징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가을의 시작인 입추(立秋),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處暑), 흰 이슬이 내리는 백로(白露),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는 분기점인 추분(秋分), 찬 이슬이 내리는 한로(寒露), 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

입추는 8월 8일 무렵으로,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든다는 신호입니다. "입추 때는 벼 자라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는 속담이 있지요. 벼가 그만큼 쑥쑥 자란다는 의미입니다. 이 무렵에는 농사가 좀 한가해집니다. 그래서 "어정 7월, 건들 8월, 동동 9월" 이라는 말이 생겨났지요. 오뉴월에는 작물 파종하고 모내기하느라 바빠 발등에 오줌을 눌 정도이고, 구월에는 수확하느라 일손이 모자라 발을 동동거리지만, 칠팔월은 그야말로 하늘에 맡기고 어정대고 건들거려도 좋을 무렵이라는 말입니다.

처서는 8월 23일 경에 드는데, “모기도 처서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무렵이 되면 바람에서 제법 찬 기운이 느껴집니다.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져 풀도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벼의 이삭이 패는 때라서 풍부한 햇살을 받아야만 벼가 성숙할 수 있습니다. 처서에 오는 비를 ‘처서비(處暑雨)'라고 하는데, “처서비에 천석을 감한다.”라고 할 정도이니 처서에 비가 오면 작황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꽃니미가 비를 좋아하지만 처서 무렵에는 하늘님에게 비 내려달라는 청탁 전화질도 참습니다.

백로는 9월 9일 무렵입니다. 밤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해집니다. 옛 사람들은 이 시기에 기러기가 날아오고,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며, 뭇 새들이 먹이를 저장한다고 했습니다. 볏논의 나락은 늦어도 백로가 되기 전에 여물어야 합니다. 백로 전후에 바람이 불면 벼농사에 해가 많습니다. 이때 태풍이 오면 죽을 맛입니다.

추분은 9월 23일 무렵으로, 추분이 지나면 점차 밤이 길어지므로 가을이 왔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추분에는 벼락이 사라지고 벌레는 땅속으로 숨고 물이 마르기 시작합니다. 추분을 즈음하여 논밭의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목화를 따고 고추도 따서 말립니다. 호박고지, 박고지, 고구마순 등 산채를 말려 묵나물을 준비해 둡니다. 꽃니미랑 겨울에 먹어야 하니까요.

한로는 10월 8일 무렵인데, 찬이슬이 맺힐 시기여서 기온이 더 내려가기 전에 추수를 끝내야 하므로 농촌은 타작이 한창인 때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단풍이 짙어지고, 여름새인 제비와 겨울새인 기러기가 교체됩니다. 가을에 누렇게 살찌는 가을 민물고기인 추어(鰍魚), 즉 미꾸라지를 잡아 추어탕을 즐기는 때입니다.

상강은 10월 23일 경이고, 된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온 땅이 서리로 뒤덮여 아침 햇살을 받아 하얗게 반짝거립니다. 단풍이 절정에 이르고 국화꽃 향기가 짙어집니다. 이 무렵이 되면 벼를 베어낸 논에 가을보리를 파종하거나 누렇게 익은 종자용 호박을 따고, 감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홍시를 거두어 항아리에 저장하고, 서리가 내리기 전에 고구마도 캡니다. 이로써 가을걷이가 마무리됩니다.

흔히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지요. 봄에는 온갖 꽃이 피니 여심이 설레지 않을 수 없고, 가을엔 찬바람이 부니 우수에 젖은 남자가 멋져 보여서 그랬겠지요. 그건 철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얘기입니다. 봄에 씨 뿌리고 김매는 일이야 여인네들이 할 수 있지만, 가을에는 힘쓰는 일투성이라서 남정네들이 나서지 않으면 안 돼서 그렇게 부른 겁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팔을 걷어부쳐야 할 계절입니다. 한여름 뙤약볕에 그을린 구릿빛 남자인 내가 이제 꽃니미를 위해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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