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글은 전부 지웠다. 쥐어 짜낸 글을 보고 싶지 않아서. 내게 있어 창작의 고통은 쥐어 짜냄에서 오는 게 아니라 펼쳐내고 깎아냄에서 오는 게 아닐까. 글을 펼쳐낸다는 것. 그리고 다시 깎아내고 다듬어낸다는 것. 나는 쥐어 짜내는 글이 아니라 펼쳐내는 글을 써야 하고 쓰고 싶다. 생각과 마음의 길을 따라가듯이 그렇게.
앞뒤가 안 맞는 걸 너무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한 지 조금 됐다. 강박처럼 내 손가락을 묶어버리는 그 억압은 조금 내려놓고, 일단 손끝에서 나오는 대로. 예전에 ‘손끝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을 쓴 적이 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내 손끝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오늘의 내 손끝은 꽤 말랑하다. 그러나 내 머리는 꽤 굳어져 있다. 잘 쓰고 싶은 부담감 때문이다. 스물한 살 때부터 십 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날 따라다니는 부담감. ‘글을 잘 쓰고 싶다.’ 잘 쓰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드는 생각이다. 내가 글을 잘 쓰고 싶은 이유는 내 글을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지만 내 글을 사랑하는 것에는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잘 읽힐 것. 둘째, 감응을 줄 것. 셋째, 재미가 있을 것. 넷째, 새로울 것. 다섯째, 정확할 것. 여섯째, 쉬울 것. 그 외의 수많은 조건. 전부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누군가 내게 그랬다. 너무 엄격한 거 아니냐고. 나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내 글에 엄격하다. 나를 사랑하기에 내가 낳은 것이 완벽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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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자식에게 완벽함을 바라면 안 된다. 자식은 살아서 생동하는 생명이자 인격체이기 때문에. 글은 어떠한가. 글은 죽어버린 것이다. 완벽하게 죽어버린 것. 내 머릿속과 내 마음속에 살아서 생동하던 것들의 잔해와도 같은 것. 그 잔해를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조각하느냐에 따라 글의 생동감은 더해지고 덜해진다. 글은 생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동감이 필요하다.
다작, 다상, 다독. 나는 그중에 다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다상의 잔해들만이 글로써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는 생각이란 의식적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생각은 마치 길이 펼쳐지듯 펼쳐지는 것이다. 펼쳐진 길을 따라가는 게 바로 생각이라는 것이다. 길은 누구에게나 펼쳐지지만, 누구나 그 길을 따라가지는 않는다.
길을 걷는 것은 고되다. 일단 길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용기가 필요하다. 두 발로 길을 걸어갈 힘도 필요하다. 길을 잘 살펴볼 수 있는 눈도, 곤두선 감각들도 필요하다. 피곤하고 또 피곤한 일이다. 인생을 피곤하게 산다는 게 이런 것일 테다. 누구나 길을 걸을 필요는 없다. 길 한편에서 집을 짓고 머물러 살아가는 것도 좋은 삶이니까.
나는 어떠한가. 지금 길을 걷고 있는가. 나의 잔해들은 어떤 모습인가. 내 생각과 마음은 잘 만들어지고 또 뱉어지고 있는가. 누군가 그랬다. 글을 쓰는 건 명상을 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라고. 나는 지금 명상하듯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글을 쓰는 순간에는 내 생각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로지 손끝으로 뱉어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이 글은 오직 나를 위한 글이다. 내가 쓰는 글은 대부분 나를 위한 글들이다. 나를 위한 글이 자폐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다. 나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 나는 여전히 나를 객관화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내 글은 일정 부분 자폐적이다. 대부분이 독백이다. 나의 독백이 독백이 아니게 되려면 나는 나와 끊임없이 대화해야 할 것이다.
나와의 대화. 오늘은 나와의 대화를 해 볼까 한다. 나와의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냥 해 보는 것이다. 다음부터 나오는 글은 내가 나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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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프다. 점심을 걸렀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으면 꼭 잠이 온다. 거울 속의 나를 본다. 거울 속의 나는 눈코 입이 보이지 않는다. 입김을 불고 서린 김에 눈코 입을 그려본다. 호흡은 따뜻하다. 따뜻한 호흡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 죽어버린 이를 생각한다. 거울 속에 그려진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건만.
‘모두 다 내 잘못이다.’로 시작하는 소설을 생각해냈다. 모두 다 내 잘못이다, 라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해 왔다. 나의 잘못들. 잘못한 어제는 만족스럽지 못한 오늘에서 만들어진다. 만족스럽지 않아. 지금의 나도, 내 글도, 내 옆에 네가 없다는 사실도.
너는 내 보호자가 되기를 기꺼이 자청했다. 눈코 입이 없는 나는 보호자가 필요한 인간.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실을 이제야 받아들인다. 나는 그만큼이나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의 보호를 받고 싶어. 커다란 손과 너른 품에 안기고 싶어.
애도의 기간이 거의 다 끝났음을 매일 느낀다. 너를 기억하고 있고 네가 그립지만, 그것보다 내가 점점 우선이 되어 간다는 것을. 지난 몇 주간 나는 없었다. 이제 내 손을 바라본다. 내 손은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살아있는 나를 위해서, 죽어버린 너를 위해서.
커피 대신에 차를 한 잔 주문했다. 나는 다시 노트북 앞에 앉는다. 한때는 비쩍 말랐던 내 손은 더는 마르지 않았다. 너는 마른 나를 기억할 것이다. 가장 초라하고 가장 비틀거리던 그때의 나를 영원히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가장 건강한 너. 박제된 너는 가장 아름답다. 박제와 아름다움에 대한 글은 십 년여 전부터 써 왔건만, 이제야 그게 무엇인지 알겠다. 지금을 위해서 쓰인 어제들.
차에서는 청포도의 향이 난다. 청포도의 시절들. 달큼하면서 산뜻하고 하늘거리는 시절들. 내게는 그런 시절이 없다고 믿었고, 내게는 그런 시절이 없었다. 내가 가진 너와의 시절은 청포도보다는 석류에 가깝다. 청포도인지 석류인지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미 먹어버렸다는 사실. 나의 욕망이 너를 집어삼켰다는 사실.
그러니까, 전부 내 잘못이다. 나를 만나고 싶어서 쓴 글인데, 나는 또 너를 만난다. 너를 향한 나의 욕망은 그만큼이나 깊고 거대한 것이다. 우리는 더는 연인이 아니었지. 그러나 그것 또한 내 욕망이었어. 연인이라는 그릇 안에 너를 담고 싶지 않았거든. 우리는 친구였지. 2년이라는 시간은 친구로 지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 아니었나.
너무 이른 시간이란 없다. 모든 시간은 제 자리에 놓여 있다. ‘모든 일은 될 일대로 된다. 무어라 감정 느낄 것도 없다.’ 너의 마지막 만화에 나온 문구. 그러나 나는 무어라 감정을 느낀다. 이미 죽어버린 너는 느낄 수 없겠지만-이라고 썼다가 그만 흠칫 놀라버리고 만다. 미안해, 내가 너를 죽여서. 더는 느끼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려서.
그래, 다시 나에 대해 말해보자. 눈코 입이 없는 나에 대해. 나는 감각하지 못한다. 아니, 못하는 건 아니다. 그저 약할 뿐. 내게는 여전히 피부가 남아 있다. 내 눈코 입은 날 때부터 없었다. 모두의 감각은 다르다. 아니, 이 말은 비겁한 말이다. 나의 감각은 다르다. 생존을 향한 비겁함.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 나를 특별히 여기지 않으려는 마음. 나의 존재를 또다시 죽이는 마음. 죽이고 또 죽여서 결국 살아내려는 마음. 살아내고 살아내어 무엇을 얻겠다고. 비겁하고 싶지 않다. 크게 한숨을 쉬어 본다. 집중하느라 입은 아까부터 옴실거린다. 이번에는 문단을 끊지 않을 거다. 이대로 호흡을 길게-따뜻한 호흡을 길게. 살아있다는 증거를 이곳에 남길 거다. 또다시 네가 떠오른다. 비겁하지 않았던 네가. 나는 너처럼 살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여태 살아있고, 아주 오래 살아남는 거겠지. 죄가 많은 자만이 오래 살아남는다. 나는 지금 형벌을 받고 있는 거야. 형벌의 증거는 나의 글이다. 다시 나에 대해 말해보자. 형벌을 받고 있는 나에 대해. 모두 다 내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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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나는 벌을 받고 있다. 내가 만난 나는 발가벗겨진 채 손발이 묶여 있다. 내가 만난 나는 눈코 입이 없다. 이제야 내 글이 왜 자폐적인지 알 것 같다. 감각의 부재. 살아있다는 느낌의 부재. 그럼에도 살아 있고 싶어 하는 나의 비겁함. 나의 글은 벌을 받고 있는 나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길은 가시밭길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힘들게 살 운명인 것이다. 나의 글을 사랑하는 데에 필요한 수많은 조건. 그 조건들은 가시들이 된다. 가시를 걷으면 될 것 아니냐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그건 마치 다른 사람이 되라는 말과 같으니까. 나는 이렇게나 고집스러운 사람이다.
고집은 자폐적으로 흐르기 쉽다. 나는 늘 기로에 있는 것이다. 자폐적으로 흘러갈 것이냐, 대화로 흘러갈 것이냐. 이 글은 제법, 아니 꽤 자폐적이다. 객관화된 나는, 자폐적인 나다. 어쩌면 관음증이 있는 누군가는 이 자폐적인 글을 마음에 들어할 테다. 나의 욕망은 거기에 있다. 누군가 이 글을 마음에 들어했으면 하는 마음. 그 마음을 덜어내고, 나의 자폐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