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위단비

전부 다 내 잘못이다. 네가 태어난 것도, 네가 죽어간 것도. 너는 나의 욕망에서 태어난 존재. 나의 자의식 과잉은 너의 삶과 죽음을 전부 내 탓으로 만들고 있었다. 사실을 나열하면 이렇다. 너와 나는 어른의 언저리에서 만났고, 우리는 채 어른이 되기 전에 엇갈렸다. 삶과 죽음의 길 아래에서. 어른의 언저리에서 죽어가던 나를 살린 건 너였다. 너를 살린 것 또한 나였다. 그리고 채 어른이 되기 전에 널 저버린 건 나였다. 그러니까, 나의 자의식 과잉이 영 망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네가 나를 살린 것은 이를테면 날카로운 송곳니를 갈아준 것과 같은 것. 나를 찌르는 칼을 내 손에서 빼내어 준 것. 손끝의 거스름을 떼 내어 준 것. 내가 너를 살린 것은 이를테면 죽어가는 화분에 물을 준 것. 흐릿해진 경계선을 또렷하게 그려준 것. 너의 이름을 불러준 것.


너는 흐릿했다. 회색의 필터가 한 겹 씌워진 듯이. 반면에 나는 날카로웠다. 검은 테두리를 마구 그은 듯이. 흐릿한 너와 날카로운 나는 서로를 첫눈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우리는 천천히 서로를 알아보았다. 천천히 서로를 어루만졌다. 흐릿한 것은 선명하게, 날카로운 것은 부드럽게. 그렇게 우리는 태어났다.


너를 태어나게 한 나의 욕망은 너를 살아있게 하고 싶은 욕망으로 이어졌다. 나의 글로, 나의 기억으로. 텅 빈 머릿속에서 너를 찾는다. 너는 내 머리보다는 내 손끝에서 살고 있나 보다. 머리는 텅 비어 있는데 손끝에서는 네가 흘러나온다.


너에 관한 나의 욕망 하나, 그렇게 내 옆에 늘 있는 존재. 너에 관한 나의 욕망 둘, 나를 그대로 받아주는 존재. 너에 관한 욕망 셋, 나를 살아있게 하는 존재. 너에 관한 욕망 넷, 나를 아껴주는 존재. 너에 관한 욕망 다섯, 나를 사랑하고 나의 사랑을 받는 존재.


너를 욕망한다. 네 존재와 우리의 영원을 욕망한다. 욕망하고 욕망하다 우리는 만났다. 내가 너를 저버린 것은 너를 욕망하는 것보다 나를 욕망하는 마음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저버리지 않았다면 너는 여전히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저버린다. 저버린다는 표현이 맞나. 너를 놓지 않았다면, 너를 나로부터 떼어놓지 않았다면.

떼어진 자국은 테이프처럼 끈적인다. 이제 너에 관한 이야기는 아껴서 쓰고 싶다. 그런데 자꾸 네 얘기가 나온다. 이렇게 다 쏟아내고 쏟아내다 더 이상 네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봐 두렵다. 평생에 걸쳐 조금씩 하고 싶은 이야기. 너에 관한, 나에 관한, 우리에 관한 이야기.


벌써 많은 것들이 잊혔다. 잊히는 것이 괴롭고 잊히지 않는 것이 괴롭다. 오늘도 네 생각이 머릿속에 출몰한다. 이랬다면 네가 살아 있을까, 이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해로운 생각들. 너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후회하지 않는 것. 그러나 나는 후회한다. 너를 끝내 밀어낸 것을.


마지막 날의 너는 떠나는 것을 망설였지. 나는 그런 너를 단칼에 보내버렸어. 오빠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너는 그런 나를 보고, 떠난 걸지도 몰라. 이제 내 안에 너보다 오빠가 더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날의 나는 네가 오빠 이야기를 참 많이도 했다. 우리 이야기를 더 했다면, 너와 나의 시간이 너와 나로 가득했다면.

그 마지막 날을 다시 한번 보낼 수 있다면. 기억에 남는 것은, 네 팔베개를 하고 잠들었던 것. 예전 같다- 하고 나는 편안한 마음에 잠이 들어버렸어. 너는 계속 음악을 틀어줬지. 이제 내게서 잊힌 노래를 찾고 싶을 때 누구한테 물어보나. 지나가 버린 영화를 보고 싶을 때 누구에게 물어보나. 그 마지막 날을 다시 한번 보낼 수 있다면.

너와 함께 잠이 들고 싶어. 지금 마침 나오는 노래는 나이트 오프 – 잠. ‘나, 조금 누우면 안 될까, 잠깐 잠들면 안 될까, 날도 저무는데, 아무도 없는데.’ 흐릿해진 경계 속으로 너와 함께 빠져들고 싶어. 무디게, 스며들게, 그렇게.


-


여기까지 쓴 그는 펜을 놓았다. 상을 접었다. 그의 방 한 켠에는 비닐에 담긴 물건이 가득했다. 누군가의 옷가지, 누군가의 신발, 누군가의 가방이었다. 물건들에서 나는 냄새는 흐릿했다. 진하게 풍겼던 누군가의 향기는 그렇게 흐려져 있었다.


그는 소파베드를 펼쳤다. 토퍼를 깔고 이 여름에 맞지 않는 도톰한 이불을 꺼내어 펼쳤다. 에어컨 바람은 시원했다. 그는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뭔가 생각난 듯이 일어난 그는 음악을 틀었다. chill 한 분위기의 음악을. 향초를 켜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간 그는 그대로 다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경계가 흐릿해졌다.


흐릿해진 경계 사이를 찢고 들어간 곳에는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책 제목은 ‘그를 잊는 방법, 그를 기억하는 방법’. 그는 책에 손을 뻗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책이 도무지 잡히지 않는 것이다. 책은 미꾸라지처럼 손 사이를 빠져나갔다. 손에 남은 건 테이프를 떼어낸 것과 같은 끈적임 뿐이었다.


그는 쩍쩍 달라붙는 끈적이는 액체를 유리벽에 문댔다. 사방이 유리벽이었다. 문대진 자국이 깨끗한 유리벽에 질척이며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는 질척이는 자국에 눈과 코와 입을 그렸다. 그 표정은 입꼬리와 눈꼬리가 잔뜩 쳐진 채 누군가를 원망하는 표정이었다. 표정은 분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과, 코와, 입을.


그는 아연실색했다. 손으로 다시 자국을 지워냈다. 손에 묻은 질척임에 어쩔 줄을 모르는 채 서 있는 그. 발을 동동 구르며 손을 들어보기도, 손바닥을 비벼보기도 하던 그는 유리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그’와 닮아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놀라서 잠에서 깼다. 그리고 그 꿈은 ‘그’가 꿀 법한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꿈 세계는 그토록 기괴하고 외로운 것이었기에. 그와 ‘그’는 제법 자주 서로의 꿈을 나눴다. 그는 꿈을 꿀 때마다 ‘그’를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월의 어느 날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날은 당신과 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었지요, 나는 잠에 빠져들었어요, 잠은 따뜻하게 나를 빨아들였어요, 빨아들이고 빨아들여, 나는 얇은 종잇장이 되었지요, 종잇장은 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당신도 어쩌면 잠이 들었을지도 몰라요, 얄팍한 종이 귀의 너머에 당신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거든요,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잤댔어요, 흉통이 심했나요, 많이 아팠나요, 당신의 웃음은 힘이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말이에요, 곧 죽을 사람의 얼굴을 구별할 줄 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종잇장은 속절없이 어디론가 굴러갔어요, 굴러가고 굴러가다 결국, 내 발치에 멈춰 섰어요, 나는 그 종잇장을 사정없이 밟아버렸어요, 구겨지고 구겨져서, 검은 발자국만 남아 있었어요, 내가 다 망쳤어요, 당신과 나의 마지막 날을, 잠을 자버려서 그만, 흐릿한 경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나는요, 당신도 나도 모르는 어느 세상 속으로,


그는 다시 펜을 놓았다. 펜은 또르르 굴러갔다. 불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펜은 그의 발치에 놓였다. 다시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는 그. 그는 테두리만 그려진 사람처럼 생기가 없었다. 그의 생기는 전부 다 손끝으로, 볼펜 끝으로 빠져나간 듯했다. ‘그’가 살아있는 손끝만이 잠에서 깨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그’와 똑같은 위치에 반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의 손의 반지 자국은 언젠가 지워질 것이다. 반면에, ‘그’의 손의 반지 자국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은 그를 죽게 했다. 죽은 것은, 영원히 멈춰진 것. 생기가 사라진 것은 그대로 그려진 것. 그려진 채로, 그렇게 그는 구겨지고 또 굴러갈 것이다. ‘그’의 발치에 도달하는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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