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아주 오래,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할 이야기다. 내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이기도 하며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중추와도 같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대해 다른 주제들처럼 시작과 끝을 한 번에 내버리면 아쉬움이 아주 많이 남을 것 같아서 하나의 주제가 끝날 때마다 한 조각씩 자유롭게 풀어놓을 예정이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마무리될지 나도 모르겠다. 그저 ‘나’라는 개인의 삶을 보여주고 싶다는 연재의 시작처럼 내가 왜 개인주의자로 스스로 정체화했고 왜 개인주의를 선택했는지, 내가 생각하는 개인주의는 어떤 것인지 천천히 풀어낼 생각이다.
어릴 적 나는 거울 속의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왜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생겼을까, 내 성씨는 왜 위 씨일까. 유난히 발이 컸던 나는 6살 무렵 신발 사이즈가 190mm였는데, 그것조차 의문의 대상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실내화에는 모두 160이 쓰여 있는데 난 왜 190이 쓰여 있을까. 저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똑같은 표정을 지으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까 싶어서 똑같은 표정을 지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이런 생각들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왠지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마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은 무리 생활을 하는 사회적 동물이며, 무리 생활에서 다름은 자칫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다름을 드러내는 것, 다름에 의문을 품는 것, 같음을 의심하는 것 모두 이 사회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나와 타인의 같음을 의심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나의 다름을 숨기느라 애를 썼다. 다름이 드러나면 숨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다름이 드러났을 때 일종의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수치스러워했다. 긍정적인 평가든 부정적인 평가든 내게 다름이란 치워버리고 싶은 귀찮은 짐 같은 것이었다. 과장되지도, 축소되지도 않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은 그때부터 내 안에 늘 있었다.
그러나 나 자신조차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지난 주제인 몸의 이야기에서 거울 앞의 느낌처럼, 강제로 거울 앞에 서지 않는 이상 당연함이라는 나태함 속에 나 자신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홀로 거울 앞에 설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았다. 그저 타인의 거울들에 왜곡된 나를 바라보며 이건 아닌데 싶은 마음만 늘어날 뿐이었다. 어쩌면 아주 최근에서야 처음으로 거울 앞의 나를 홀로 보게 된 걸지도 모른다. 홀로 떨어져 지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면서.
나만 이렇진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같음을 의심했지만 교집합도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외로웠다. 외롭고, 또 외로웠다. 우린 모두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우리가 다르다는 걸 알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면 아마도 조금은 덜 외로워지지 않을까 싶었다. 같은 척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다름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관계, 다름이 약점이 되지 않는 관계. 물론 관계의 발전은 운도 필요할 것이고 코드도 맞아야 할 것이다. 그래도 적어도 나한테는 너무 당연한 그 사실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모두 다르다는 당연한 사실. 그리고 자꾸 잊어버리는 사실. 내심 두려워하는 사실. 누군가는 한편으로는 바라는 사실. 나를 외롭게 하는 이유. 나를 자유롭게 하는 이유. ‘나’로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 잊지 말아야 할 사실. 나와 타인은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건 틀린 게 아니라는 것. 나 자신과도, 나와 같은 외로움을 공유하는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살아가며 그런 외로움을 공유하면서도 함께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공유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았지만, 공유가 되더라도 그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 상상하고 실현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에서야 내가 원하던 관계와 근접한 관계를 아주 운이 좋게도 맺을 수 있었다. 나는 이 관계망을 ‘4차원 식구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