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단비 Oct 13. 2020

어떤 피해자의 삶 (3)

삵은 밟힌 꼬리의 책임을 묻는 일도

흉터를 가리려는 노력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자책은 오만과 같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상황을 과대 혹은 과소로 보는,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면에서 자책과 오만은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거라는 요지의 말이었는데,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끊임없이 자책과 오만을 오가던 내게 더더욱 그 말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오만의 뒤엔 늘 수치심이 뒤따랐다. 수치심은 곧 자책을 불러왔다. 상황을 제대로 봤다면 자책할 일도 오만할 일도 아닌 것을. 자책과 오만은 상황을 과대 혹은 과소로 보는 것 외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상황에 대한 책임을 과도하게 본인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러다 상황이 나빠지면 자책을, 상황이 좋아지면 오만을 부리게 된다.


책임이란 무엇일까. 전부 내 책임인 일이, 전부 외부의 책임인 일은 과연 존재할까. 책임의 비중을 묻는 거라면 그 비중을 따지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상황에 대해 보상을 받고 싶어 한다. 그게 나쁜 상황이든, 좋은 상황이든. 때문에 책임 소재를 가르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다. 누군가의 것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누가 더 큰 보상 혹은 벌을 받을 것인가를 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벌과 보상이다. 모든 일이 제로섬 게임이고 모든 일이 주고받는, 혹은 뺏고 뺏기는 일인 세상이 바로 이 곳, 지옥 같은 인간 사회다.


어릴 때부터 익숙해진 그 규칙을 나는, 우리는 내면화한 채 살아왔다. 벌을 받게 될 것인가, 상을 받게 될 것인가. 외부에서의 벌과 상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벌과 상을 준다. 선과 악의 이분법은 너무나 뿌리 깊다. 나는 그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보호할 줄 몰랐다. 오히려 그 틀 안에 나 자신을 가둬둔 채 단죄의 시간을 보냈다. 그 오랜 단죄의 시간이 지나자 복수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분노의 후폭풍처럼 자기 학대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내가 서 있었다. 누구를 향한 것이든 단죄는 내게 더 의미가 없었다. 보상은 물론 책임을 묻는 것 또한 이미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다만 내게 의미 있는 건 내가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였다.


살아가기 위해서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기로 했다. 사회생활과 삶을 영위하는 것과 누군가를 지켜내는 것과 하고 싶은 일을 해 보는 것. 그러나 그것들은 내게 숙제였다. 지나고 보니 그랬다.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숙제들. 정상적인 삶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숙제만 남은 맹목적인 삶. 정상성의 허울은 무의식의 영역 깊숙한 곳까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평범한 삶에 대한 욕망, 평범에 대한 선망. 그것은 인간 사회에서는 생존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 끊임없이 교류하며 생존을 이어가는 인간들에게 다름은 교류의 장애물로 작용하고 이는 평범함에 대한 선망을 부른다.


반면에 비범함에 대한 욕망은 생존에 대한 욕구보다 개별적 존재에 대한 욕구가 더 강할 때 일어난다. 비범함에 대한 욕망만 가득하고 평범함에 대한 욕망이 없는 상태를 나는 ‘생존 욕구의 결여 상태’로 본다. 생물체라면 생존 욕구를 우선으로 활동하고 살아가야 하는데 그 부분이 결여된 상태라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보다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행동의 동기가 되는 상태, 비범함에 대한 욕망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나의 생존 욕구와 존재에 대한 욕구는 언제나 대치 상태였다. 평범한 삶에 대한 선망과 나다운 삶에 대한 욕망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의 공존은 소용돌이처럼 내 마음속에 혼란을 가져왔다. 전형성에 꼭 들어맞는 경험으로 공감을 받고 싶다는 욕망과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경험으로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욕망처럼.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했다. 열네 살부터 10여 년 간 그때의 이야기를 하며 조금씩 거짓을 섞어 왔던 것이다. 성폭행인 줄 알지 못했으면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공감을 받고 싶은 욕망에, ‘평범한 피해자’이고 싶은 마음에. 여전히 내 마음에 걸려 있는 건 그런 내 말을 듣고 공감해준 이들에 대한 미안함이다. 나중에야 성폭행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때에는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그 거짓말은 나 자신에게도 나쁜 영향을 줬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함에 대한 상처였다. 나 스스로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함으로써 스스로로부터 받는 상처였다. 평범성에 대한 욕망이 존재에 대한 욕망을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단 열네 살의 성폭행 피해 경험만이 그런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었던 건 아니었다. 사회생활을 하며, 연애를 하며, 그냥 삶을 살아가며 언제나 그런 이중성의 소용돌이는 나와 함께 있었다. 이중성의 소용돌이는 내게 모순을 안고 살아가게끔 했다. 나의 모순을 본 이들은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순간들이 전부 진심이었음을 안다. 나의 생존과 존재에 대한 욕구는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모순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할 때 이분법은 힘을 얻는다. 생존이냐, 존재냐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분명 생존의 위협은 받아본 적이 별로 없지만 나의 존재는 끊임없이 위협받으며 살아왔다. 열네 살 때의 그 일은 나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의지를 깡그리 밟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보이는 것 이면의 내가 삭제되었으며, 연애를 하면서는 내가 나를 상대로부터 지켜내는 것을 잊었고, 삶을 살아가면서는 ‘정상적인 삶’을 향한 숙제를 위해 나다운 삶을 포기해왔다. 존재에 대한 위협은 존재의 보존에 대한 욕망을 점점 키워왔고, 생존에 대한 욕망을 점점 흐릿하게 만들었다. 내 이분법의 세계에는 오직 존재만이 가득 차 있었다. 


후에 상담을 받으며 나도 모르게 해 버리고 놀랐던 말이 있다. ‘열네 살 때 저는 있는 힘껏 저항하다 그냥 맞아 죽었어야 해요.’ 너무도 진심이어서 놀랐던 말. 어쩌면 그 뒤로 덤처럼 살았을 내 인생. ‘나’라는 존재가 진흙탕으로 고꾸라지며 그만 생존의 욕망마저 죽어버린 그 마음. 나의 새로운 숙제는 나의 존재가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이다. 나의 짐을 여기까지 이끌고 생존해 온 것은 나의 힘이라는 것 또한. 정상적인 삶을 위한 숙제가 아닌 ‘나’ 다운 삶을 위한 숙제다. 나는 더 이상 책임을 묻지도 돌리지도 않듯이 더는 생존이냐 존재냐 싸우지도 않기로 했다. 나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 생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전 16화 어떤 피해자의 삶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