삵은 밟힌 꼬리를 바라보며
그곳을 지나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2003년이었다. 여름 방학이었고, 나는 열네 살이었다. 당시에는 윈엠프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한 음악 방송이 한창 유행했다. 나도 방송을 해 보고 싶었다. 더럽게 재미없는 열네 살이 진행하는 방송의 청취자 수는 많아봤자 고작 4명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게 참 재밌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멘트를 하고 사람들이 내 방송을 들어준다는 게 좋았다. 청취자 중 몇은 나를 친구로 추가했다. 몇 안 되는 청취자 중 한 명이 내게 쪽지를 보내왔다. 당연하게도 반가웠다. 반갑게 청취자시냐고 응답했고, 스물여덟 살의 그는 통화를 하자고 했다. 통화는 길지 않았다. 그는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마냥 설렜다. 첫날 첫 통화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게 좋아한다고 해 주는 것. 열네 살의 내가 그토록 꿈꾸던 일. 그는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 달여간 통화를 했다.
그는 이상한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첫 키스는 해봤냐, 남자랑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냐, 가슴은 어느 정도 크기냐, 손에 잡힐 정도이긴 하냐.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나는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했다. 자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분명하게 전했다. 그 말이 통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천사 같다고 했다. 목소리가 너무 좋고 천사 같다고. 천사 같다는 말은 14년 인생에서 처음 들은 말이었다. 한 달여간의 통화 끝에 그는 내게 직접 만나자고 했다. 장소는 신사역. 섹스를 하지 않겠다는 확언과 천사 같다는 그의 말을 믿고 나는 그를 만나기로 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건 내게 도전이자 설렘이었다. 꽤나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랐던 나는 한 번도 혼자 지하철을 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엄마한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짜릿했다. 부푼 마음으로 신사역에 도착했다.
신사역 출구에서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내가 열아홉 살처럼 보인다고 했다. 이미 키가 160cm 정도였고, 또래에 비해 발육이 좋았던 나는 그 말이 낯설지 않았다. 그는 지하에 있는 경양식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내게 스테이크 비슷한 걸 시켜주고 그는 버드와이저 맥주를 병째 마셨다. 버드와이저는 다른 맥주보다 부드러워서 좋다고 했다. 그리고 나오는 길, 계단 아래 화장실이 있던 그 경양식집의 입구에서 키스를 ‘당했다.’ 그 장면을 표현하자면 ‘당했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읍, 하고 소리를 내는 나와, 그런 내 입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혓바닥.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서 있던 내 모습. 그는 내게 ‘이게 첫 키스는 아니지?’하고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놀란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했다.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조용한 곳이 어딘지 몰랐다. 그는 어느 건물 카운터에서 사촌 동생이라는 단어가 섞인 어떤 이야기를 하고, 내게 오라고 손짓했다. 그를 따라간 곳에는 누런 벽지와 TV와 탁자와 침대가 있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문 앞에 서 있었다. 그가 침대에 누우며 ‘아 좋다!’라고 탄성을 냈다. 내게 침대 옆에 앉으라고 했다. 조심스럽게 침대 옆에 앉은 내게 누워보라 했다. 싫다고 하자 괜찮다고 하며 나를 잡아당겨 눕혔다. 생경한 침대의 느낌. 아직 나는 쭈뼛거리는 상태였다. 그는 내 가슴을 만졌다. 저항하지 않았다. 섹스는 하지 않을 거라 했으니까. 그는 내 가슴을 입으로 애무했다. 멀뚱멀뚱 바라보며 저항하지 않았다. 섹스는 하지 않을 거라 했으니까. 그는 자신의 가슴에 뽀뽀를 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대로 했다. 섹스는 하지 않을 거라 했으니까. 그는 내 위에 올라왔다. 그래도 가만히 있었다. 섹스는 하지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그런 그가 섹스하자고 했다. 거절해도 통하지 않자 나는 만화책에서 본 거절 방법을 따라 했다. 생리 중이라며 완곡하게 거절하는 방법이었다. 마침 생리 중이기도 했으니까. 그는 그럼 생리대를 차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확인해보면 안 할 거라고 생각했다. 팬티 속에 손을 집어넣어 생리대를 직접 만진 그는 날 보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 내 청바지를 벗겼다. 나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런 내 상체를 그는 밀어서 눕혔다. 바지를 벗기고 내 위에 올라와 내 양 팔을 완력으로 누른 채 그는 ‘그 짓’을 했다. 나는 ‘그 짓’이 진행되는 동안 마치 내가 나를 관망하듯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마비되어 있었다.
‘그 짓’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건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나치게 순진한 아이였다. 집에 오는 길의 달라진 사람들의 표정, 한 톤 어둡게 내려앉은 풍경이 내게 무섭게 다가왔다.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사람들의 표정이 무서운 표정으로 변해 있었고 지하철 풍경은 회색 필터를 씌운 듯이 한 톤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집에 와서 걸레질을 하는 엄마의 굽은 등을 보며 절대 엄마한테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방에 들어와 팬티 속을 봤다. 생리대엔 정액이 묻어 있었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야. 이제 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전부 내 탓이었다.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지 못한 내 탓이었고, 바지를 벗기는 손길을 막지 못한 내 탓이었고, 되지도 않은 생리 핑계를 댄 내 탓이었고, 그의 가슴을 애무한 내 탓이었고, 그의 애무를 막지 못한 내 탓이었고, 침대에 누운 내 탓이었고, 침대에 앉은 내 탓이었고, 그곳에 따라 들어간 내 탓이었고, 키스를 하도록 내버려 둔 내 탓이었고, 그를 만난 내 탓이었고, 그와 통화한 내 탓이었고, 음악 방송을 시작한 내 탓이었다. 내 탓으로 나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상실감이 느껴졌다. ‘상실감이 느껴졌다.’는 말이 너무 가볍게 느껴질 만큼의 감정이었다. 이 상실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내 주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생각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다녔다. 주변 사람이 아닌 온라인에서. 사람들은 나를 비난했다. 그때의 인식에서 나는 되바라진 년이었고 비행 청소년일 뿐이었다. 학교에서 꽤나 모범생으로 통하던 내게 그 일은 나를 발가벗겨 진흙탕 아래로 고꾸라뜨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발적으로 ‘그 짓’을 했다. 뭔지도 모르겠는 소문의 ‘그 짓’을. 나를 아프게 하는 ‘그 짓’을. 나를 미워하게 하는 ‘그 짓’을. 나를 진흙탕 밑바닥의 밑바닥으로 마구 주저앉히고 싶었다. 섹스는 내게 그런 것이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고, 나를 미워하는 것이었다. 열네 살의 일이 ‘그 짓’이 아니라 ‘그 일’이 된 것은 10년 뒤의 어떤 상담사가 ‘성폭행’이라는 단어를 꺼냈을 때부터였다.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나는 성폭행이 뭔지, 성폭행과 섹스가 무엇이 다른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안다. 그 일이 성폭행이 아니라 설령 섹스였다 하더라도 내 정체성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인간의 정체감은 생각보다 나약하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도 흔들리는. 왜곡된 정체감은 내 정체성을 왜곡시키고 싶어 했다. 그렇게 10년을 살았다. 나는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이 부러웠다. 내게는 그런 분노도 오열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상실된 나 자신과 왜곡된 정체감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뒤의 6년, 이제는 그 왜곡된 정체감에 사로잡혀 살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를테면 최근에 ‘꼬신다’는 단어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튀어나온 적이 있는데, 그 단어에 나는 구토감을 느꼈다. 내게 ‘꼬신다’는 단어는 나를 모텔로 데려간 그의 행위와 같은 것이었다. 꼬셔도 넘어가지 않을 선택권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난 아직 완전히 느끼지 못한다.
‘어떤 피해자의 삶’은 이렇다. 나는, 그는 성폭행을 당했다. 그 성폭행은 맞고 때리는 그런, 당시의 보편적 이미지 속의 성폭행은 아니었다. 그는 그게 성폭행인지 10여 년 간 알 수 없었다. 그 시간 동안 그의 성 관념은 왜곡되어 있었고 왜곡된 성 관념에 따라 무분별한 섹스를 하고 다녔다. 그 10여 년 중 3년여의 시간 동안은 은둔형 외톨이처럼 집에서만 지냈다고 한다. 후에 그 일이 성폭행임을 알고 난 후,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어느 정도는 그 일로부터 벗어나서 생활했지만, 그에게 그 일, 10여 년 간의 일들은 아직 그도 미처 다 알지 못하는 흔적들을 남겼다. 그는 흔적을 가진 채로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흔적 또한 그에게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흔적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없어지지 않는 나의 일부. 한때는 짐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아픈 부분. 작년에는 처음으로 그 흔적을 안고도 여태껏 변하지 않았던 나의 또 다른 일부가 대견했다. 그리고 연민을 느꼈다. 자기 연민은 나를 만나는 시간이라는 어떤 분의 말처럼 나는 처음으로 나를 만났다. 그러나 답을 알 수 없었다. 그저 나는 어떤 것이 결여된 사람이 아니고 나의 정체성을 타인이 규정할 수 없으며 나는 지금까지처럼 나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대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답 없는 이 질문에 끝없이 대답하며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