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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손 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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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단비 Jul 02. 2022

2022.07.02 손 풀기

비가 오기 전엔 유난히 더운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덥고 습한 것을 견뎌보려고 한 것이다. 뜨겁고 습한 오늘. 그러나 내일도 비는 오지 않았다. 모레도, 다음 날도 비는 오지 않았다. 이렇게 기다리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에어컨이 없는 그는 어느 카페에 가 앉았다. 카페는 시원했다. 사람은 많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은 금방 녹아버렸다. 이 날씨에 청자켓이라니.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태양을 피하기 위한 방법일지도 몰라. 아니면 걸어 다닐 일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지. 반바지에 반팔을 입은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여기, 나는 그를 지켜보고 있다. 그가 기다림을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어차피 더운 뒤에 비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그 비가 안개비인지, 소나기인지만 다를 뿐. 더위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글피에도 계속됐다. 그리고 나는 그 뒤의 일을 쓰려고 한다.


톡톡, 두드리는 소리. 통유리를 누군가 두드렸다. 아니, 누군가인가? 쨍-한 빛줄기의 단면은 통유리를 그대로 통과하고 있었다. 밖엔 아무도 없었다. 다시 톡, 소리가 났다. 늘어진 옷처럼 널브러져 있는 그는 창을 바라보았다. 작은 동그라미 하나가 보였다.

동그라미는 유려한 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 길이 아름답도록 반가웠다. 음표를 그리며 내려온 동그라미는 이내 다른 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림을 그도 함께 기다렸다. 그는 눈이 동그라미처럼 변했다. 투명하고 맑은 동그라미처럼.

수돗물 소리가 났다. 곧 동그라미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비처럼 쏟아진 동그라미들은 빠르게도 웅덩이를 그렸다. 그려진 웅덩이들은 귀엽게도 몽실거렸다. 웅덩이 위로 파장이 인다. 동그라미들이 만드는 파장이었다. 동그라미, 그리고 그 옆의 동그라미. 동그라미들. 길고도 긴 동그라미들.

넘치지는 않았다. 비처럼 쏟아진 동그라미는 아직 공기를 식히지는 못했다. 그는 창을 열기보다는 창밖으로 뛰어나가기를 선택했다. 머리 위로 톡 톡 소리가 났다. 아니, 소리가 나는 듯했다. 촉감이 느껴졌다. 까만 머리는 곧 젖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타고 음표가 다시 그려진다. 아, 이제 슬슬 식는 거 같아. 생각도, 눈도, 공기도 조금씩 서늘해진다. 빨래야 하면 되지.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는 순간이었다. 이 동그라미의 정체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 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시간을 맞고 있다. 시간은 내게 두 팔을 주었다. 두 팔은 기지개를 그린다. 그려진 기지개는 강한 직선으로 하늘을 뚫는다. 그래, 나는 기지개야. 오랜 더위 끝에 펼치는 기지개.

찰박, 하고 웅덩이 위를 밟는다. 흙탕물이 온 사방에 튄다. 아무려면 어때. 빨래야 하면 되지. 동그라미들은 계속해서 쏟아진다. 수돗물 소리는 귀 바로 옆에서 들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그 편이 오히려 나아. 지금 이 순간이라는 뜻이니까.

그는 드디어 그 단어를 내뱉는다. 자유. 자유! 자유는 여기에 있다. 동그라미들 사이에, 기지개를 켠 두 팔의 사이에, 하늘과 땅 사이에, 시간과 시간 사이에, 음표와 음표 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대기권에서 내려온 동그라미는 그의 눈과 입 위에 떨어졌다.

뒷모습이었다.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은. 비처럼 쏟아진 동그라미들은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는 꽤 즐거워 보였다. 동그라미가 너무 많았지만. 기지개를 닮은 그림자는 그를 따라가고 있었고, 곧 동그라미는 잦아들었지만 그의 어깨는 여전히 꼿꼿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전부였을지 몰라. 이 순간을 기다린 기나긴 시간보다. 아니, 그 이전의 모든 시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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