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처음 비아프란치제나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풋풋한 연애 초기였다. 지금은 남편이 된 그때의 남자 친구 이삭이 어디선가 보고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정해지지 않은 여행을 좋아하지는 않는 나지만, 그냥 새롭게 만난 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이삭이 꺼내는 이야기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고 우리가 돌고 돌아 다시 만나고 결혼을 결심하고, 결정적으로 내가 임용고시에 떨어져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가 된 2018년 2월. 이번에는 내가 먼저 신혼여행으로 순례길을 가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우리는 겁도 없이 한 달 만에 장비를 사고, 딱 한 번의 연습을 마친 뒤에 90일 동안 둘이 합쳐 20kg을 들고 떠나는 1800km 순례길을 시작했다.
처음 이삭을 알게 되고 한동안은 나와 정말 비슷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우리는 정말 달랐다. 서로가 사기를 당했다고 느낄 정도로. 이삭은 미국에 어릴 때 이민을 가 오랫동안 살았던 경험 때문인지 훨씬 자유롭고 새로운 걸 도전하는 걸 망설이지 않는 성격이다. 반면, 나는 계획해서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걸 좋아하는 신중하고 안정적인 성격이라 할 수 있다. 특별한 자극이 없다면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고, 굳이 별나게 행동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순례길을 떠나게 한 결정적인 외부 충격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임용고시 탈락이었다. 나름 공부에서라면, 아니 시험을 보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는데 아무리 공부한 기간이 짧다지만 1차에서 탈락하고 나니, 28살의 경력 없는 내가 너무 초라하게만 보였다. 붙었는지 떨어졌는지 친구들, 친척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싫었고, 다시 당장 신혼 초부터, 했던 공부를 또 해야 하는 것도 시간낭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정말 충동적으로 여러 가지 좋은 이유를 갖다 붙여서 신혼여행으로 순례길을 가자고 제안했고, 나와는 달리 정말로 여러 가지 바람직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던 이삭은 흔쾌히 승낙하고 함께 준비를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순례길을 떠난다. 누군가는 정말 종교적인 이유로 신을 찾으러 떠나기도 하고, 누군가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러 떠나기도 한다. 각자가 마음속의 고민을 가지고 답을 찾기를 기대하며 순례길에 오르는데, 나에게 순례길은 질문이 없이 답을 찾으러 떠난 여행이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보이는 지금, 걷고 나면 어떤 방향으로든 상황이 해결될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둘 모두는 길을 걸으면서 그리고 돌아오고 지금까지, 우리가 이 여행을 왜 했는지, 그리고 이게 얼마나 값진 여행인지를 매일 느끼고 있다.
한국사람들에게 여러모로 알려진 산티아고 순례길과는 달리 비아프란치제나는 이름 자체도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영국 캔터베리 성당에서 시작해서 뱃길을 지나 프랑스, 스위스, 알프스 산맥을 거쳐 이탈리아 로마에서 마무리가 되는 이 순례길은, 총 1800km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만큼 순례자도 적고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지 않다. (2016년에 산티아고를 걸은 순례자는 250,000명인데 비해 비아프란치제나를 걸은 순례자는 2500명이다.) 때문에 매일매일을 알 수가 없고 자주 계획을 바꿔야 한다. 그런 이유로 이 순례길을 선택했다. 머리가 어지러울 때, 숨이 차도록 달리거나 땀을 뻘뻘 흘리며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몸을 힘들게 해 머리를 맑게 하는 것처럼, 우리도 좀 더 도전적이고 힘든 일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사실 순례길의 시작, 우리 결혼생활의 시작점에 서있던 우리는, 수도생활을 바라보고 각자 길을 걷다 나와서 다시 만난 상태로, 길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영혼이 지쳐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떠날 때, 모든 사람은 이 시간을 잘 기록하고 간직하고 싶을 것이다. 누군가는 사진을 많이 찍어 둘 것이고, 이삭 같은 경우도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으면서도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바꾸고, 친구들에게 선물 받은 액션 카메라 고프로로 순간순간을 기록하는 걸 고대하고 있었다.
여행을 가거나 친구들 과의 만남, 심지어 사진 전시회에서도 가장 그 시간을 오래오래 소중하게 보관하는 좋은 방법은 글쓰기라고 느껴왔던 나는, 인생에 한 번 뿐일 이 신혼여행이자 대장정의 도보여행을 준비하면서도 그 기록의 방법은 글쓰기가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글쓰기 중에서도 특히 일기 쓰기는 내가 보낸 시간들이 날아가지 않도록 시간들에 추를 매달아 놓는 느낌이다. 그래서 아무리이고 지고 다니는 배낭여행이라도 일기장은 당연히 가져갈 심산이었는데, 이왕 쓸 거 제대로 써보도록 아예 우리만의 맞춤 일기장을 만들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일정에 맞춰 매일매일의 페이지를 만들고 어디서 걷기 시작해서 어디서 마무리를 지었는지, 오늘은 얼마큼 걸었는지를 비롯해서 그날의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감사한 순간, 그리고 매일매일 서로에게 나누고 싶던 질문들까지 적어 우리만의 일기장을 만들었다. 욕심껏 좋은 종이와 간간히 컬러 페이지(!!)까지 넣어서 한 권당 출력 및 제본 비용이 자그마치 5만 원에 달하는 이 일기장은 우리가 함께 만든 첫 책이었고, 우리에게 엄청난 보물이 되었다. (이후, 무릎의 관절이 나갈 만큼 짐이 무겁다는 걸 발견하고, 급하게 짐 줄이기를 시작한 때에도 일기장만은 놓고 갈 생각이 없었다. 이삭은 생각이 변했지만!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