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 한국, 서울. Day 2 영국, 캔터베리.
Day 1. 웨딩드레스와 턱시도, 그리고 배낭
결혼식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정신없이 지나갔다. 이른 아침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고마운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부모님을 바라보며 감회가 새로워지고, 저녁에 준비한 친구들 과의 소소한 애프터파티까지. 꽉 찬 하루를 보냈다. 드레스를 입는 것도 설렜고, 드디어 이삭과 부부가 되는 성스러운 순간도 감격적이었지만, 우리 둘 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내일 당장 떠나는 우리의 순례길에 마음이 한껏 들떠 있었던 것이다. 신부대기실에서 드레스와 양복 위에 각각 50L, 65L 배낭을 멘 채 기념사진을 찍고, 결혼식과 애프터 파티 그 사이 시간 동안, 순례길 떠날 배낭을 싸면서 서로의 설렘을 재잘거렸다.
Day 2. 시동걸기
한국 시간 새벽 3시.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 싸락눈이 날리고 있었다. 3월 중순임에도 유럽 전체가 이상기후로 아직도 겨울 날씨라는 것을 우리는 그제야 알았다. 짐에 부칠 무게를 줄인다고 가진 옷을 다 입고 있었음에도 추위를 막을 수 없어, 오들오들 떨며 소매를 끌어내려 차가운 카트를 잡고 간신히 이동했다. 시작부터 매끄럽지 않았지만 결혼한 지 만 하루가 된 커플에게는 흐린 영국 하늘 싸락눈도 핑크 빛이었다.
시차 적응 겸 결혼식의 피로를 풀 겸, 이틀 정도를 순례길의 시작점, 캔터베리 킵스 호스텔에서 묵으며 시동을 걸기로 했다. 킵스(Kipps) 호스텔은 비아프란치제나 순례자들 거의 대부분이 첫날밤을 보내는 곳으로, 저렴한 가격에 비해 아기자기 꾸며져 있는 단독으로 쓸 수 있는 방과, 캔터베리 시내며 대성당과의 거리가 짧아 아주 매력적인 숙소다. 영국에 처음 와 본 여행 뜨내기는 방안의 소품 하나하나를 보면서부터, 아침식사로 준비된 빵과 흔한 오렌지 잼을 먹을 때까지 계속해서 “여기 너무 좋다!!”를 외쳤더랬다.
어제의 공항에서의 추위를 기억하며 캔터베리에서 당장 방한용품을 몇 가지 샀다. 경량 조끼와 비니, 장갑과 머플러까지, 가난한 순례자 모드에 적응이 안된 상태라 약 150파운드를 많은 고민도 없이 지출했는데, 그래도 덕분에 2달 뒤, 알프스를 지나며 기록적인 눈 더미 안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크레덴셜을 구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순례자 여권은 순례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작은 책자로, 순례자 할인을 받을 때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주된 용도는 도시마다 바에서, 관광사무소에서, 또는 순례자 숙소 등에서 도장을 받음으로써 바티칸에서 순례길 완주를 증명하는 것이다. 바티칸 스위스 근위병에게 이 여권을 보여주면 특별히 마련된 방으로 순례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 증서를 발급해준다. 아직 빳빳한 종이에 첫 번째 도장도 받지 않은 채로 이름과 주소를 쓰고 서명을 했다. 기념사진까지 한방 찍고 나니 드디어 순례길에 오른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