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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01. 2020

첫 번째 낯선 천사

Day 3. 영국 canterberry 캔터베리 - Barhem 바헴

 영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이삭이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 베키를 잠깐 만났다. 베키와 나눈 이야기 중,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은 낯선 이들을 가장한 천사일 수도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이 것은 우리가 순례길 동안 배운 가장 큰 몇 가지 중의 하나이자,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가 절절히 체험한 것이었다. 


 본격적인 순례의 시작이었지만 우리의 마음가짐은 그냥 신혼여행 온 방방 뜬 커플이었다. 그 흔한 순례 다큐멘터리조차 보지 않고 왔고, 아직 3월 중순이라 안 그래도 사람이 없는 비아프란치제나의 길 위에는 정말 우리 밖에 없어서, 다른 순례자들이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전혀 몰랐다. 보통의 순례자들은 아침 일찍 6시~7시쯤 일어나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부지런히 걷고 간단하게 요기를 한 뒤, 2시~ 늦어도 4시까지는 그날의 도착지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도착한 도시를 둘러보며 다음날을 채비한다. 하지만 우리는 특별한 뜻이 있어서 라기보다, 잘 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순례자 답지 않은 일상들을 보냈는데, 그 정도가 첫날에는 특히 심했다. 

 우리의 일정상, 그리고 보통의 순례자들은 평지를 걷는다면 하루 25km 정도를 걸어야 하는데, 첫날의 우리는 고작 15km를 장장 8시간 동안 걸었다. (보통 성인의 도보 속도가 1시간에 5km인 것을 감안하면, 아무리 10kg이 넘는 가방을 메고 있다지만 대충 셈을 해보시면 얼마나 날라리로 걸었는지 짐작이 가시리라.) 부끄럽지만 우리의 날라리 첫날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래도 이 날은 시차의 도움으로 일찍 일어났다. 그런데 순례길의 시작점인 캔터베리 대성당에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받으러 갔는데, 사무소가 10시에 연다고 했다. 첫 발걸음을 떼려고 희망차게 나왔는데 김이 팍 새면서, 1시간이 넘게 성당 주위를 뺑뺑 돌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서 으스스한 영국 날씨를 느끼며 시간을 때우다 도장을 받아 길을 나섰다. 그렇게 늦게 떠났으면 서두를 법도 한데, 그래도 신혼여행이라고 틈틈이 사진을 많이 찍자고 1시간에 한번 10분의 쉬는 시간을 2,30분으로 늘려가며, 여러 포즈로 사진 찍느라 많이 가지도 못한 채 오전을 다 보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바람이 너무 많이 분다고 징징댄 아내 덕분에, 유부남 3일 차 열정 가득한 남편은 들판에다가 텐트까지 쳤고, 이래저래 마트에서 사 온 점심을 맛있게 먹긴 했지만 먹고 정리하는 데만 1시간은 걸렸다. 이렇게 노닥거리며 걷는 와중에 당장 오늘 잘 곳은 마땅한 숙소가 없는 곳이라는 걸 발견했고, 점심때 부랴부랴 비아프란치제나 페이스북 페이지에 SOS를 담은 글을 올렸다. 숙소는 구하지 못한 채로, 5시쯤 작은 마을, 바헴에 도착했고 일단 저녁이나 먹으며 생각하자고 마을 레스토랑에서 시간을 때웠다. 

텐트에서의 점심식사

 해까지 저물어가고 레스토랑에 더 있기도 눈치가 보일 무렵, 기적같이 그 마을에 사시며 순례자들을 가끔 공짜로 재워 주시곤 한다는 분의 연락처가 우리의 SOS에 댓글로 달렸다. 우리는 실례일 걸 알지만 다급히 그분께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첫 번째 낯선 천사, 분홍색깔로 염색한 머리가 인상적인, 바헴의 멋쟁이 할머니 발레리였다.  


 요즘 여기저기 생겨나는 카페들을 보면, 여러 가지 콘셉트를 만나게 된다. 모던함을 내세우는 딱 떨어지는 무채색으로 장식된 높은 천장이 돋보이는 카페, 커피에 집중해서 커다란 커피 자루가 벽에 기대어 있고, 향기부터 벽지까지 진한 커피를 떠올리게 하는 카페까지. 한편 이것저것 다양한 소품들이 아기자기하면서 조금 번잡하리 만치 빈 공간 없이 채워져 있는 카페들도 있는데, 발레리의 집은 딱 이런 느낌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발레리의 집의 모든 소품들은. 공간을 채우기 위해 동시에 놓인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몇 개월에서 2~30년까지의 각자의 시간을 담고 있다는 것. 다음 날, 손자 손녀 가족들이 놀러 올 예정이라 준비된 빈 방이 하나밖에 없다고 미안해하며 내어 주신 방 역시 피아노, 카펫, 인형들이 꽉 차 있었다. 그곳이 황송하리 만치 따뜻하고 아늑한 우리의 첫 숙소였다. 

 다음날 아침, 발레리가 아침 식사를 달그락 소리와 함께 준비해주시는 동안, 부엌에 조그만 피아노를 발견해 90년대에 한국에서 태어난 여자애답게 피아노 학원에서 체르니 치던 실력으로 뚱땅거렸다. 부끄러워 뚜껑을 덮으려는데, 발레리가 한동안 치는 사람이 없었다며 계속 연주해달라고 하셨다. 계속해서 점수를 매김 하던 한국의 교육 탓인지, 웬만큼 잘하지 않으면 즐기면서 하는 것도 포기해버리게 되는데, 그 순간만큼은 대단하지 않은 실력이지만 햇살 들어오는 부엌에서 빵 굽는 냄새를 맡으며 피아노를 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토스트 한 바게트와 버터, 여러 가지 마멀레이드와 커피를 함께 먹으며 집이 정말 예쁘다고 말씀드렸더니, 발레리는 자기가 정리를 잘하는 성격이 아니라 정신은 없지만 각각의 물건들이 자기는 아는 위치에 잘 놓여있는 거라고 싱긋 웃으며 말하셨다. 따스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뭐라도 보답할 게 없나 가방을 뒤적이다가 결혼식 폐백 뒤에 밤과 대추를 받아온 복주머니를 발견했다. 내용물을 가방에 서둘러 털어놓고 10파운드를 넣어 발레리께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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