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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03. 2020

고속도로 횡단

Day 4. 영국 Barhem 바헴 – Dover 도버

 비아프란치제나에서는 걸어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구간이 한번 있는데, 바로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가는 구간이다. 그래서 오늘은 영국 쪽의 항구도시이자 어디서도 보지 못한 하얀색의 거대한 절벽이 유명한 도버까지 20km를 꼭 걸어야 하는 날이었다. 


 사실 바헴은 비아프란치제나 길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는 도시여서, 다시 길까지 가기 위해 구글 지도의 도움을 받았다. 구글에 아무런 악감정도 없고, 오히려 이삭은 구글에서 사은품을 보내줄 만큼 우수이용자지만, 순례길을 걸을 당시 구글 지도는 그야말로 발등 찍는 믿는 도끼였다. 가장 최단거리로 가면 되겠다 싶어 구글 지도를 따라 방향을 잡고 걷고 있는데 점점 길이 커지더니 어느덧 8차선 고속도로까지 나와 있었다. 조금만 걷다 보면 금방 다시 샛길로 빠지겠지 했는데, 어디서 빠져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고,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도 점점 좁아졌다. 우리는 결국 차들이 아주 쌩쌩 달리는 8차선 고속도로에서 길까지 건너라는 지시에 따라 중앙선에서 한 줄로 아슬아슬하게 걸어야 했다. (이 날의 일은 아마 영국에서 불법일 것이고,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실 것 같아 지금까지 비밀로 하고 있었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조금 가다 보면 고속도로 옆에 바로 위치한 휴게소 뒤로 샛길이 있다길래,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건너 휴게소가 있다는 곳에 다다랐다. 그런데 그 휴게소는 문을 닫은 지 오래, 폐쇄되기 직전의 휴게소였고 울타리가 철조망으로 잠겨 있어서 우리가 가야 할 샛길까지는 앞길이 막막했다. 점심도 먹지 못한 탓에 더 막막해지고 있는데, 이삭이 울타리를 둘러보고는 구멍을 발견했다며 가보자고 했다. 

 몰디브나 하와이에서는 배울 수 없지만 순례길 신혼여행에서는 매일 얻게 되는 결혼생활의 지혜 중 하나가 서로를 믿고 무작정 길을 찾아보는 것이다. 규칙을 어기는 데서 스릴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마음이 한없이 불안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후자에 속한다. 그 순간에도 혼자였으면 정말 안 했을 선택이었겠지만 혼자 뒤로 갈 수도 없는 마당에, 함께 나뭇가지를 헤치며 수풀을 지나 철조망 속 구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수풀이 꽤 우거져서 맑고 화창한 날씨였음에도 빛이 거의 안 들어오는 철조망 바깥쪽에서 낑낑대며 구멍을 지났을 때 우리에게 펼쳐진 광경은, 한없이 펼쳐진 지평선에 4m는 되는 나무들이 가로수처럼 드문드문 이어진 오솔길이었다. 그 순간, 고속도로를 지나오고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막다른 골목에 놓여, 있는 대로 졸였던 마음은 터지기 직전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이 편안해졌고, 인생 처음으로 보는 끝없는 지평선을 한껏 즐겼다. 

 법도 어기지 않으면서(!) 사람이 걸으라고 만들어진 길을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느끼며 한층 가벼운 발걸음으로 여러 풍경의 길을 걸었다. 마침 마을도 만나, 마트에서 샌드위치와 런치박스를 사 먹고 조금 더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드디어 인자한 미소를 가진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순례자 그림이 들어간 비아프란치제나 표시를 발견했다. 산티아고 길의 유명한 노란색 화살표나 조개 모양 표지판처럼, 비아프란치제나 길에도 영국에서부터 로마까지, 나타나는 빈도는 나라마다 길마다 많이 다르지만, 이 순례자 표시가 비아프란치제나임을 알려준다. 이 길을 걷는 순례자가 많지 않기에 지도와 나침반만 가지고 걷다 보면, 우리가 맞게 걷고 있나 의심이 들 때가 있는데, 가끔씩 나타나는 이 인자한 미소가 우리에게 안심을 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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