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우리 스케줄에 맞춰 가기 위해서는 비아프란치제나 길에서 10일에 해당하는 정도의 거리를 건너뛰어야 했다. 우리는 어느 부분을 건너뛰어야 하나 고민이 많았지만 그래도 가장 긴 부분을 차지하는 프랑스 부분을 넘기는 것으로 결정했다. 생캉탱에 마침 기차역이 있었기에, 여기서 샴페인으로 유명한 샬롱 앙 샹파뉴라는 도시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어제 저녁 우리의 히어로였던 마리 아주머니는 공짜로 재워주고 저녁을 주신 것도 모자라, 아침에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표까지 챙겨서 정류장까지 우리를 데려다주셨다. 마리 아주머니와 마지막으로 기념사진을 하나 찍고 메일 주소를 주고받은 뒤, 버스를 타고 기차역에 도착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우리가 걸으면서 볼 수 있었을 풍경들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다 비슷한 풍경일 거라 생각해서 10일 치, 그러니까 약 200km를 건너뛰는 것을 그렇게 아깝게 생각하지는 않았었는데, 막상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들은 빠르게도 변했다. 이삭은 특히 프랑스의 국왕의 대관식이 이루어져 왕들의 도시라고 불리는 랭스를 들리지 못하는 걸 유감스러워했다. 대관식이 이루어졌던 랭스의 커다란 성당 건물이 언덕 위에 있는 것을 멀리서 지나치며 보기만 해야 하는 처지는, 특히 건축을 공부했던 이삭에게 더 큰 아쉬움을 남겼다.
이전에는 걷는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순례길을 경험한 후부터는 걷기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 방법이 되었다. 걸으면서는 걷지 않았으면 놓쳤을 삶의 작은 조각들까지 만날 수 있다. 꼭 순례길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순례길이 끝나고 1년이 더 지난 후, 10개월 된 첫째 아이를 데리고 제주도를 여행할 때도 우리는 도보여행을 선택했다. 덕분에 해변에서 소라게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커다랗고 회전율이 빠른, 아니 빨라야만 하는 맛집이 아니라 지역의 작은 상점에 방문해서 주인 분과 도란도란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기차를 타면서 오히려 걷기의 소중함을 느끼며, 짐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지도책에서 지금까지 걸었던 부분을 찢었다. 그리고 오늘 도착할 도시의 성당에 전화해 혹시 숙소를 구할 수 있을지를 여쭤 보기로 했다. 다행히 신자분들 중에 비아프란치제나를 걸으셨던 부부가 재워 주실 수 있다 하셔서 그 분과 성당 앞에서 5시에 만나기로 했다.
일찌감치 성당 앞에 도착해서 기다리는데 아무도 우리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5시가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어서 성당 주위를 뺑뺑 돌다가 결국 신부님께 물어보자는 생각으로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처럼 만나야 할 사람을 못 만난 한 아주머니가 신부님을 찾아와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놀랄 때 “힉!”하고 소리를 내시는, 실례일지 모르지만 상당히 귀여운 아주머니가 오늘의 우리의 호스트 브리짓 아주머니셨다.
브리짓 아주머니의 집은 지금까지 묵었던 집들과 또 사뭇 달랐다. 자그마한 문으로 들어가니, 넓은 거실과 식당이 있고, 그곳을 지나 각각의 방과 통로들에는 빨간 벽에 모자가, 파스텔 톤 벽에 많은 수의 화분이 개성을 맘껏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머니의 남편 프랑슈아 아저씨가 보였다. 프랑슈아 아저씨의 하얀 수염과 하얀 머리칼이 얼마나 멋있던지 이삭은 만난 지 5분 만에 그분을 롤모델로 정했다. 그다음 날 아침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순례길을 걸으셨을 뿐 아니라 평소에 마라톤도 즐겨하신다고 했다.
큰 마을에 도착한 만큼, 이삭은 오랫동안 먹고 싶어 하던 중국음식 뷔페에 가고 싶어 했다. 브리짓께서 저녁식사를 함께 먹을 건지 아니면 도시를 보러 나가겠는지 물어보셨을 때, 당신 선택에 맡기겠다는 마음을 담아 이삭을 쳐다보았다. 이삭은 잠깐 눈빛이 흔들렸지만 이내 같이 식사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저녁식사 시간, “샴페인에 왔으면 샴페인을 마셔야지!”하는 프랑슈아아저씨의 유쾌한 말씀을 시작으로 한 잔씩 샴페인을 하며 또 다른 스타일의 프랑스 가정식을 함께했다. 그리고 이삭이 중국음식 뷔페를 포기한 덕분에 저녁식사 시간 동안 두 분의 순례길 스토리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성에 살던 존과 마리 부부와는 다르게 브리짓아주머니와 프랑슈아 아저씨는 좀 더 우리 과였다. 얘기는 이러했다. 비아프란치제나 길목에 사는 부부는 언젠가 우리도 순례길을 걸어봐야지 하다가 용기를 내어 2014년에 길을 나섰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자는 것이 너무 겁이 난 나머지 그 날 가야 할 곳까지 걸어서 간 다음 아들을 불러 집으로 다시 돌아와 잤다. 그렇게 집에서 밤을 보내고 나면 아들이 다시 부부를 원래 있던 곳까지 고대로 태워주고, 부부는 다시 걸어서 그다음 목적지까지 가고 다시 돌아와 자는 것을 며칠을 반복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용기를 쌓은 다음에야 아들은 더 이상 부르지 않고 순례길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차를 타고 매일 밤 돌아오시는 브리짓 아주머니의 모습이 그려져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런 분들이 목적지마다 받은 도장들로 꽉 채워진 순례자 여권과, 순례길을 완주하고 나면 로마 바티칸에서 받을 수 있는 증서를 보여 주시자, 친근함을 통로로 밀려온 용기는 더 컸다. 특히 전형적인 가정주부로 평생을 산 브리짓 아주머니가(아주머니의 취미는 다양한 조합으로 잼 만들기였다,) 알프스를 걸어서 넘고 샹파뉴부터 로마까지 1500km 정도를 완주하신 순례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우리를 고무시켰다. 존과 마리 부부와의 만남이 무림의 고수를 만난 것과 같았다면 프랑슈아와 브리짓과의 만남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의 성공기를 보는 것 같았다. 순례길 내내 프랑슈아 아저씨가 쓴 일기는 프랑슈아의 비서의 손을 거쳐 작은 책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비서분은 로마에 도착한 이야기를 써야 할 마지막 날 아쉬운 마음에 펑펑 우셨다고 한다. 소심하게 시작했던 발걸음이 어떤 성장 기록으로 남았을지 상상하면서, 우리의 앞길에 대해서도 또 다른 기대가 생겼다.
보통 안정된 직장과 커리어를 버리고 순례길을 가거나, 장거리 트래킹을 다니거나, 세계일주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저 사람들은 정말 특별하고 유별나다고 느끼고,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운동이 생활화된 사람이려니, 걷는 걸 원체 좋아하려니,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으려니. 그렇지만 개중에는 처음 며칠은 차로 집으로 돌아와 자면서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고, 짐을 너무 많이 싸서 중간에 택배로 보내거나, 못 걷겠으면 택시도 타고 히치하이킹도 하는 순례자들도 있다. 빈틈없이 매끄럽기를, 서투르지 않고 멋있기를 포기하기만 하면 각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길을 시작하고 끝맺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