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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Oct 16. 2020

첫 번째 임신 테스트

Day 18. 프랑스 뻬혼느 - 생캉탱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나서 아직 계획은 뚜렷하게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아직 초시, 처음 본 시험이었기 때문에 한 번 더 시험을 봐야지 하고 어렴풋이 마음먹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태어난 이래로 항상 일을 하셨다. 때문에 머릿속에 엄마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나 역시 당연히 직장에 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기를 가질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시험에 붙고 다음 1년은 일을 하고, 그러면서 우리 둘만의 신혼생활도 즐기고 아기를 가질 생각이었고 이삭도 내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그럼에도 길을 걸으면서 아이를 갖게 되면 ‘비아프란치제나’에서 길이라는 뜻인 ‘비아’라고 태명을 짓자고 이야기하고, 순례길을 걷다가 임신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프로토콜 등을 정해 놓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임신할 생각이 없는 부부는 맞나 싶다. 


 첫 번째 임신 테스트는 프랑스의 구청 화장실에서 시행(?)되었다. 여자의 감이 있는지라,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생리가 좀 늦으니 해보자고 했던 거라 나는 전혀 기대가 없었다. 그런데 이삭은 달랐다. 프랑스산 임신테스트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구입해서 구청 화장실로 가는 내내 이삭은 너무나 신나 보였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내가 한 줄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을 때, 화장실 앞 벤치에는 빨간 불이 들어온 고프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미 혼자 임신을 확인한 표정으로 눈가가 촉촉한 이삭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비아(아직 존재하지 않았던)를 만난 순간을 녹화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이삭이 프랑스 꺼는 혹시 한 줄이 임신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며 앞뒤로 돌려가며 확인해보았지만 설명서는 아니라고 분명하게, 그림으로도 영어로도 말해주고 있었다. 어쩐지 좀 시무룩해진 이삭이 재밌기도 했는데 한편 어쩐지 내 마음 한구석에서도 조금의 실망한 마음을 발견했다. 아마 많은 신혼부부의 첫 임신 테스트가 그렇듯. 어쨌든 일단 구청을 나와 오늘의 길을 시작하기로 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이삭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은 아니었다. 이틀 연속으로 27km를 걷고 난 뒤였지만 오늘도 목적지까지 30km를 걸어야 하는 날이었다. 쉬고 난 뒤에 적응기 없이 전보다도 더 많은 거리를 걸어서 그런지 둘 다 발이 많이 아팠다. 게다가 태풍 같은 비가 오다 말다 했고, 하필 우리가 가는 방향 반대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검은 비옷을 입고 쫓아오는 검은 먹구름을 피해 바람을 거슬러 걷는 모습은 흡사 영화 반지의 제왕의 모르도르를 향해가는 호빗들 같았다.  휴식시간에는 이삭이 식물에 물렸다. 정확히는 물린 것은 아니고 독이 있는 풀 위에 앉아 알레르기가 올라왔는데, 벌레도 아니고 가만히 있는 식물에게 당하다니, 참으로 운수 없는 날인가 보다. 설상가상으로 오늘따라 궂은 날씨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도 궂었는지, 화장실 부탁도, 도저히 못 걷겠어서 부탁한 히치하이킹도 몇 번을 거절당했다. 

 그렇지만 길에서는 나름대로의 즐거움도 있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바게트를 뽑아 먹을 수 있는 빨간색 자판기를 발견하기도 했고, 새로운 길동무 달팽이도 만났다. 노란빛과 연둣빛의 가느다란 나무들 옆에 드문드문 붙어있는 달팽이들의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오늘의 숙소는 도착할 도시의 관광안내소에 전화를 걸어 구한, 무료로 재워 주시겠다는 마리아주머니의 집이었다. 저녁식사를 함께하기로 해서 제시간에 도착해야 하는데, 길을 따라간다면 도저히 약속시간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기역자로 돌아가야 하는 지도를 대충 보고는, 풀밭을 가로질러가자고 마음먹고 길을 틀었다. 비가 오다 말다 한 뒤라서 진흙 밭이라 걷는 데는 더 힘이 들었지만, 기분 탓인지 길이 줄어든 것 같았다. 지쳤지만 윈도우 배경화면 같은 언덕에서 바람을 맞으며 사진을 찍고, 서로의 사진을 보며 낄낄대고 놀리기 바빴다. 

 하지만 거리가 줄어든 느낌은 진짜 기분 탓이었고, 아직 10km는 남았는데 시간은 저녁 6시였다. 가까운 차가 다니는 도로가 꽤 큰 도로였고, 마침 퇴근시간, 집에 간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빨리 달리는 차들뿐이라 히치하이킹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택시를 부르자니 우리가 새로 정한 원칙을 일주일도 안돼 깨는 일이었다. 너무 지쳐서 일단 도로변 레스토랑 앞에서 쉬면서 고민하다가 일단 마리아주머니께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다고 전화를 걸었다. 구글 번역기를 통한 프랑스어와 영어단어를 조합해서 말씀드리는데, 아주머니가 서툴지만 또박또박하게 우리가 있는 레스토랑 이름을 들으시더니 “거기 그대로 있어.” “Stay. There.”이라고 말씀하셨다. 대충 이해한 바로는 우리를 차로 데리러 오시겠다는 거였다. 뜨문뜨문 내뱉으신 그 말이 우리에겐 마블 히어로가 내뱉는 “아이 엠 아이언맨” 수준으로 멋있었고, 아주머니의 마중은 우리를 구하러 아이언맨이 오는 것이었다. 

 덕분에 도착한 아주머니의 집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다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먼저 샤워를 하고, 다 젖어버린 양말과 옷들을 빨아 널었다. 아주머니가 해 주신 키쉬로 배를 채우고 와인도 한잔했다. 그러고 나서 뜨개질로 만든 예쁜 이불 위에서 일기를 쓰고 있자니 고된 하루가 언제였나 싶었다.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더 나빠질 수 있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두 사람이 서로를 보고 웃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행복한 하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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