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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Oct 06. 2020

또 다른 순례자

Day 15. 프랑스 아라스

 아라스를 떠나기 전 날,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로 또 다른 순례자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순례길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만나는 다른 순례자인지라 어디서 왔는지, 성별은 뭔지, 나이는 얼마나 되는지 궁금한 게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때, 막 도착한 듯 진흙이 잔뜩 묻은 바지를 입고 밥을 푸는 세바스찬을 처음 만났다. 영국에서 온 금발머리의 마른 체구를 가진 세바스찬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갈 때까지 1년 정도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 보낼지를 고민하다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아 비아프란치제나 길에 올랐다고 했다. 그러니까 지금 막 19세가 된 어린 청년이었다. 하지만, 이미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산을 등반하기도 한, 모험심도 경험도 우리보다 많은 친구였다. 세바스찬도 우리가 처음 만난 순례자였기 때문에, 나이도 나라도 다르지만 서로를 굉장히 반가워했고 또 빠른 시간 내에 친해졌다. 

 세바스찬은 떼루안의 숙소 에덴에서 머물 때, 우리가 적었던 방명록을 보고 자기보다 3일 정도 앞서 한국인 순례자 커플이 걷고 있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우리가 매일 인스타그램을 하듯이, 세바스찬은 블로그*에다가 순례길 일상을 적어 놓고 있었는데, 그 블로그에는 우리가 ‘한국에서 온 신비로운 커플’(Korean mysterious couple)로 묘사되고 있었다. 꽤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마침 우리는 3일을 쉬었고 세바스찬은 매일 쉬지 않고 걸어서 아라스에서 만날 수 있었고, 다음 숙소는 같은 곳을 소개받아 내일 일정은 자유롭게 함께하기로 했다. 

 미국에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보낸 이삭에게 모국어는 한국어보다는 영어였다. 그에 반해 나는 영어권 국가에서 살아본 경험은 고등학교 때 3주 호주 어학연수가 전부였고, 읽기, 듣기, 쓰기는 어떻게 되더라도 말하기만큼은 장벽에 부딪히는, 전형적인 한국 영어교육의 결과물이었다. 영국에서 보낸 이틀을 제외하면, 그래도 프랑스를 걸으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는 둘 다 불어는 일자무식하니 비슷한 위치에서 소통한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종종 영어를 자유롭게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까진 아니더라도 꿔다 놓은 한국인쯤 되는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처음 세바스찬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이삭과 세바스찬은 서로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니까 너무 좋다면서 물 만난 물고기들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오가는 말은 알아듣고 있지만 신나서 빠르게 말하고 있는 영국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적절한 말을 해야 할 타이밍에 열심히 영어로 문장을 만들다 보면, 대화는 이미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순례자를 만나 신은 나지만 괜히 초라해진 것 같아 방으로 들어와 이삭에게 꽁한 마음을 풀어놓았다. 그런데 이삭은 내 이야기를 잘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리나, 근데 나는 한국에서 항상 그렇게 느껴.”

머리를 딩하고 맞은 느낌이었다. 한국어가 많이 익숙해졌지만 어려운 단어나 속담 같은 것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이삭은, 한국에서 지내는 매일매일에 이런 순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당연한 역지사지를 왜 지금까지 못하고 있었을까 생각도 들면서, 그럼에도 항상 밝게 내 친구들, 우리 가족들과 만나고 대화에 참여해주는 이삭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내가 물었다.

 “힘들지 않아?”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이제는 괜찮아! 그래도 가끔 어려울 때도 있고… 제일 어려울 때는 영어로 말하면 내가 진짜 웃긴 사람인데 그걸 몰라준다는 거지!”

그리고 이삭은 얼굴 밑에 브이 자를 만들어 갖다 대며 씨익 웃었다. 지금도 진짜 웃긴데 영어로 말할 수 있는 환경에 가면 얼마나 웃길지 기대된다고 맞장구를 치면서도, 이삭의 열등감 없는 모습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이렇게 되기까지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과정이 있었을까 싶었다. 지금도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을 이삭과 함께 만날 때면 내 안에 콤플렉스가 고개를 들곤 한다. 하지만 내 사람들을 만날 때 이삭의 노력을 떠올린다. 이 어려움 또한 서로의 세계가 만나 각자의 세계를 더 넓히는 과정임을 기억하며.


*세바스찬의 블로그

http://travellingberger.com/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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