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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Oct 09. 2020

조심과 의심 그 사이

Day 16. 프랑스 아라스 – 바뽐므

 아라스에서 3일 정도 걷기를 쉬다 보니 오히려 빨리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일찍 하루를 시작했다. 택배로 총 5kg을 보내고, 물도 3L씩 지고 다니다가 1L만 가지고 출발하기로 했으니 둘이 합쳐 배낭 무게가 총 9kg은 줄은 셈이었다. 오늘은 존과 마리 부부의 팁처럼 지나가다 마주치는 마을에서 물도 청해 보기로 했다. 세바스찬과는 계속 같이 걷기보다는 자유롭게 걷다가 중간중간 쉬면서 만나기로 해서, 우리가 먼저 출발했다. 그런데 역시 젊어서 그런지 금방 우리 뒤를 쫓아와서 이내 같이 걷게 되었다. 3일 전과 비교했을 때 생긴 소소한 변화와, 오랜만에 길에 올랐다는 사실은 우리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늘따라 시작부터 응원해주는 분들이 많았다.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창문에서 우리를 보시던 한 아저씨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시고는 힘내라는 손짓을 보내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경당 같은 곳에서 기도도 드리고 구경하고 있는데 관리하시는 분이 순례자들이냐며 이야기를 건네셨다. 그리고는 간식이라도 하고 가라며 갑자기 집으로 초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불쑥 따라가도 되는 건지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세바스찬과 이삭은 벌써 흔쾌히 예스를 하고 아저씨를 따라나서고 있었고, 나도 세바스찬까지 이제 우리 쪽수가 셋은 된다는 생각에 경계를 풀고 따라갔다. 그리고 침대 위에 다 꺼내 놓았던 우리의 전재산을 떠올리며 가진 돈도 얼마 없는데 뭐 어떤가 싶기도 했.


  나는 사실 좋게 말하면 조심성이 있고, 나쁘게 말하면 의심도, 겁도 많은 성격이다. 이를테면 이삭이 면접을 보러 가 예상했던 시간이 넘어도 연락이 안 되면 머릿속으로  납치당한 게 분명하다는 확신에 차 불안해하는 식이다. 지금도 그런 성격은 변함이 없지만, 순례길을 걸으면서는 낯선 사람들한테 받은 환대의 횟수가 당황스러운 일을 당했던 횟수를 월등히 넘었던 것은 사실이다. 아저씨네 집에 도착했을 때도 위험한 사건이 아니라(당연하게도) 브라우니와 커피, 차 한잔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계시던 아내분은 마침 부활절이라 브라우니를 구워두었다고 하시며 마당의 하얀 탁자로 우리를 초대하셨다. 영국인 세바스찬은 티타임이 너무나 그리웠다고 하면서 차를 홀짝였고, 우리는 다 같이 영국인 아니랄까 봐하며 웃었다.

  다른 순례길 에세이에서는 화장실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는지 모르겠다. 창피를 무릅쓰고 풀어내 보자면, 우리는 자주 자연으로 돌아가는 경험을 해야 했다. 비아프란치제나 길에서는 공중화장실을 찾기가 정말 힘들다. 특히 땅이 넓고 사람들이 많이 안 지나다니는 프랑스 길을 걸을 때는 마을과 마을 사이도 멀고, 마을이라고 해서 공중화장실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어떤 부부들은 결혼하고 방귀도 서로 안 튼다고도 하는데, 우리는 당장 신혼여행에서부터 노상방뇨를 터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혹시 이 사실을 모르고 신혼여행으로 비아프란치제나를 선택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미리 밝혀 둔다.) 그래도 작은 일의 경우에는 괜찮은데, 큰 일의 경우는 정말 난감해서 숙소에서만 해결하기를 택한 나는 변비가 생겼다.


 하지만 나름 배변활동이 건강했던 이삭은 이날 오후 햇빛이 쨍쨍해질 때쯤 갑자기 신호가 왔다. 차마 숲 속에서 해결하기는 어려운데,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곳은 아주 조그만 마을, 공중화장실은 없어 보였다. 점점 얼굴이 창백해지고 힘들게 걷고 있는 이삭을 보다가, 존과 마리 부부의 팁을 이용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정원에 물을 주고 있는 아저씨가 보여 절박했던 이삭이 용기를 냈다.

 “안녕하세요, 정말 실례지만 저희는 순례잔데요, 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

 서바이벌 불어로 여쭤보느라, 아마 위의 문장처럼 공손한 표현이기보다는 아마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정말 실례. 우리는 순례자. (배를 만지며) 화장실? 화장실?”

 다행히 아저씨는 잠깐의 고민 뒤에 문을 열어 주셨다. 처음에는 조금 경계하는 얼굴이셨지만, 급히 살았다는 표정으로 화장실로 들어가는 이삭과 위험하기보다는 꾀죄죄해 보이는 얼굴로 감사하다고 말하는 나를 보시고는 경계를 푸셨다. 비아프란치제나가 지나가는 마을이라 순례자들이 종종 지나가기는 한다며,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어보시기도 하고 나갈 때는 견과류와 생수 2병까지 챙겨 주셨다.  


 여행을 갔을 때 사람들의 환대를 경험해본 적이 다들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 정도가 순례자인 경우에는 더했고, 특히 유럽의 시골마을에서 (어쩌면 그 사람들이 살면서 처음 보았을) 아시안의 외모는 그냥 지나갈 사람들도 붙잡는 마력이 있었다. 먼저 도움을 청했건 손을 먼저 내밀었건 그분들은 모두 우리에게 낯선 천사들이었다. 당연히 거절당하는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먼저 청하는 것이 핵심이었고, 현명하게 행동해야 하지만 신뢰를 보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처음의 민망함만 극복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길에서 훨씬 더 많은 인연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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