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4. 프랑스 아라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면 연애할 때와는 달리 많은 것이 변화된다. 일단은 모든 가족의 기념일이 2배가 된다. 생일날만 해도 남편 생일만 달력에 더해지는 게 아니라 우리 부모님 생신, 시부모님 생신, 어버이날 행사도 2번씩 달력을 메운다. 공유하는 것도 서로의 이야기나 일상뿐 아니라 집, 그 안에서도 방이라는 완전히 사적인 영역의 공간을 공유하게 되고, 자잘한 물건들도 함께 쓰다 보니 서로의 취향도, 그리고 함께 만나게 되는 친구들도 공유한다. 그 과정은 때로는 서로의 세계를 넓히는 것 같아 기쁘면서도, 껄끄럽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우리는 결혼하고 2주 만에 가정경제위기를 맞이하게 되고, 덕분에 한걸음 더 부부가 되었다.
아라스에 도착하고 머무는 3일 동안, 허니문 모드에 돌입한 우리는 돈을 펑펑 쓰기 시작했다. 조그만 장터에서, 꽃 시장도 구경하고 올리브와 치즈, 소시지도 조금씩 사서 맛보았다. 한 끼는 호기롭게 레스토랑에 들어가 피자를 사 먹기도 했다. 걷던 중 아시안 레스토랑을 발견하고는 가격표는 보지도 않고 당장 들어가 먹기로 했다. 안 그래도 한식을 정말 좋아하고 집에서는 김치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던 나는, 걸을 때도 밥때가 돼가면 비빔밥, 떡볶이, 순댓국, 감자탕 등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하는 것이 거의 순례길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와서 처음 먹어본 크림 뷔릴레의 캐러멜화 된 설탕 윗부분을 깨는 것보다 더 설레고 신나게 비빔밥 위의 노른자를 터트렸다. 평범한 비빔밥 한 그릇에 거의 2만 원이 다 되었지만 후회 없는 소비를 했다 생각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동안 매일 얼마를 쓰고 있다고 적기는 했지만 어림짐작으로만 우리의 경비를 알고 있었고, 환전해온 돈이 얼마고 지금 얼마 남았는지가 확실하지 않아 가진 돈을 다 꺼내고 셈을 해보기로 했다.
숙소에 와서 침대 위에 배낭 안에 있던 모든 돈을 꺼내고 지금까지 쓴 돈들을 적어 두었던 일기장을 펼쳤다. 한 곳에 두면 소매치기라도 당할까봐 (하지만 정작 길에서는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소매치기가 다가오면 저 멀리서부터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저기 숨겨놓았었는데, 막상 꺼내 놓고 보니 남은 돈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우리의 가정 경제는 완전 비상이었다. 처음 잡았던 예산은 하루 50유로였지만, 도착해서 방한용품을 산다고 160유로쯤 써버리고, 중간중간 택시 한 번씩 탈 때마다 몇십 유로, 예기치 않게 택배 보내는 비용도 있었고, 초기에 뭣도 모르고 에어비앤비에서 숙박하며 하룻밤 자는 데만 40유로씩 써버려서 이대로 가다가는 이탈리아 국경에도 못 간 채 집에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이거 밖에 없는 거야?”
“리나 가방에 좀 더 있지 않아?”
“나 있는 거 다 꺼낸 거야!”
이런 종류의 대화가 오간 뒤, 우리가 다 먹은 밥그릇 바닥만 긁고 있다는 걸 깨닫고 앞으로를 준비하기로 했다. 결연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앞으로의 규칙들을 정했다. 아프지 않으면 택시 타지 않기. 하루에 무슨 일이 있어도 50유로 넘기지 않기. 불러주는 가격은 늘 깎아 보기. 등이 그것이었다.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우리의 전재산을 다시 소중히 챙겨 넣기까지 우리에게는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꽤나 심각한 순간이었지만, 그날 일기장에는 가장 감사한 순간이 돈을 세며 규칙을 정하던 이 시간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대성당을 방문한 우리는 엄청난 크기의 유럽의 모든 순례길이 적혀 있는 20유로짜리 지도를 발견하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구입했다. 그 지도는 지금까지도 한번 펴보지 않고 침대 밑 수납장에 그대로 있는데, 이런 걸 보면 사람은 참 쉽게 안 변하나 보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