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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5. 2020

배낭 하나에 인생을 담는 법

Day 12. 프랑스 아메츠  – 빌라 샤틀

 모든 여행의 시작처럼, 순례길을 떠날 때도 짐싸기가 그 시작이다.  하루 평균 25km를 걸어야 하기에 무게를 알맞게 하는 것이 중요한데, 보통 권장하는 무게는 남자는 11~13kg 정도, 여자는 8~9kg 정도다. 트래킹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장비가 전혀 없어서, 준비하는 단계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장비 구입이었다. 침낭을 사려고 보는데, 예쁜 색깔에 영하 10도에서도 따뜻하고 무엇보다 두 개의 침낭의 지퍼를 연결하면 커다란 하나의 침낭이 된다는 제품을 발견했다. 신혼의 단꿈을 꾸었던 우리는 마지막 특징에 특히 흥분하며, 무려 미국에서 결혼식 참석을 위해 오는 친구에게 부탁해 그 침낭을 구매했다. 그런데 도착한 침낭은 하나에 3kg에다가 부피가 엄청나서 침낭을 넣으면 다른 장비를 다 빼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이삭 아버님이 건축현장에서 쓰던 낡은 침낭을 대신 가져가기로 하고, 새 침낭은 침대 밑에 묻어두기로 했다. 이 해프닝에서도 알 수 있듯 우리는 그야말로 맥시멀 리스트였는데, 순례길을 하면서 블로그를 하겠다며 노트북을 챙기기도 하고, 파마를 새로 하고 떠나는 거니까 헤어 에센스도 꼭 필요하다며 넣을 정도였다. 챙기고 나니 비가 와서 안에 있는 노트북이 젖으면 큰일이니 드라이백을 구매했는데, 두툼한 비닐로 된 드라이백은 아무것도 안 넣어도 무게가 꽤나 나갔다. 그렇게 순례길을 한 번이라도 걸어본 사람이 본다면 아주 무식하게도 쌌다고 할 우리 가방은, 매일 아침 담는 3L의 물까지 합하면 이삭 것은 20kg, 내 것은 14kg의 무게를 자랑했다. 가방의 무게 덕분에 발목과 무릎이 주인만 모르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던 찰나, 생초보 순례자 부부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존과 마리 부부를 만나게 된다.

맥시멀 리스트의 침낭

 오늘의 목적지 빌라 샤텔 Villas-Chatel(성의 마을)이라는 도시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마을이었다. 앞서 들렸던 수녀원의 글라라 수녀님이 이 성에 가면 전 세계의 순례길을 이미 여러 번 걸으셨던 부부가 계시고, 순례자들을 아주 싼 값에 재워 주신다고 하셔서, 성에서 잘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과 순례길 고수 부부를 만난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은 성목요일(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수난을 받은 성금요일의 전날), 가톨릭에서는 중요한 날이라서 저녁 6시에 그 부부와 함께 미사를 드리기로 약속도 해 두었다.  

 빌라 샤텔까지 가려면 27km, 그러니까 지금까지 하루에 걸었던 거리가 20km 정도인걸 감안하면 우리에게는 도전인 셈이었지만, 요 며칠과는 달리 아침부터 날씨가 화창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가보기로 했다. 한 아름에 안 들어올 정도로 기둥이 굵은 나무들이 쭉 늘어서 있고 바닥에는 노란 이끼가 껴있는 신비로운 풍경의 길을 걸으며 한적한 마을을 지나고, 수풀 속의 가느다란 오솔길을 새소리를 들으며 지날 때까지는 햇살을 즐기면서 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점점 흐려지더니 오후에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3km를 걸을 때는 비가 말 그대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꽤 많은 거리를 걸어서 약속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굵은 빗속에서 속도를 내기는 힘이 들어 미사는 포기해야 하나 하고 있었다. 그때, 개미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던 벌판 저 멀리서 작은 자동차가 한 대가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동차는 우리 앞에 멈춰 서더니 창문을 내렸고, 그 안에는 존 아저씨가 계셨다.

 “오늘 온다는 순례자 커플 맞지요? 비가 많이 와서 미사에 늦을 까 봐 데리러 나와봤어요.”

 조금 지쳐가고 있었던 터라 반가운 마음에 ‘당장 타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아저씨가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뜻밖이었다.

“여기서 집까지 그렇게 멀지는 않은데, 남은 길 걸어서 갈래요? 아니면 태워줄까요?”

 순례자로서 오늘의 길을 마저 다 걸어서 완주하고 싶은지 하여 물어보신 질문이었다. 일부러 차로 데리러 나오셨음에도, 우리의 길을 존중해주시는 모습에 과연 순례자 고수의 센스와 배려구나 싶었지만 날라리 순례자인 우리 둘은 마음만 받고 냉큼 타기로 했다.

 차를 타고 도착한 성은 정말 말 그대로 디즈니에 나오는 성이었다. 하얀색 울타리로 둘러싸인 웬만한 학교 운동장보다도 큰 잔디밭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듬성듬성 있었고, 그 중간에 군청색 지붕에 회색 빛이 도는 벽돌로 된 4층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성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존 아저씨는 14세기에 지어진 성이라고 말해주셨고, 가족이 대대로 가지고 있는 성인데 자기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이 말이 더 충격이었다.) 방이 30개 정도 있다고 하셨다. 이렇게 큰 성의 주인이 낡고 작은 자동차를 운전하고 계신 것도 인상 깊었고, 차에서 내렸을 때 존 아저씨의 190은 되어 보이는 키에 한 번 더 놀랐다. 존과 마리 부부의 큰 키와 곧은 자세, 연세에 비해 훨씬 건강해 보이시는 모습은 두 분이 걸어오신 여러 번의 순례길을 증명해주는 듯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비아프란치제나를 걷는 것은 선물 같은 일이라고 확신하지만, 천주교 신자로서 걷는 우리에게는 좀 더 선물 같은 순간들이 있었는데 존과 마리 부부처럼 순례길의 여러 호스트 분들도 신자 셔서 함께 미사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짐을 풀어놓고 함께 갔던 성당에서 존과 마리는 우리를 한국에서 온 순례자라고 마을 분들에게 소개해 주셨고, 프랑스의 작은 마을 성당의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던 우리 둘은 시선과 환대를 한 몸에 받으며 미사를 드렸다. 신부님께서도 기도에서 우리의 순례길을 함께 기억해 주셔서, 성당에 모인 신자들이 우리를 위해 잠깐 기도해 주시기까지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순간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우리가 지나온 길의 여러 천사들과 여러 기도들 덕분에 위험했던 많은 순간들을 모두 무사히 보내고 순례길을 마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미사를 마치고 성으로 돌아와서 존과 마리 부부의 식당에서 함께한 저녁식사는 여러 번 언급했듯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순간이었다. 감히 이 저녁식사를 기점으로 우리의 순례자 레벨이 중급 정도로는 업그레이드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어렸을 때 함께 놀던 사이였다는 두 사람은 커서 함께 삶을 꾸리는 부부가 되었고, 자식들을 키워 독립시키고, 존이 59세가 되신 2000년. 가족들이 모두 떠난, 방이 30개인 커다란 성에는 오롯이 두 분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때,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거의 매해 2000km가 넘는 순례길을 떠나셨다고 했다. 사실 세계 곳곳에는 스페인의 산티아고나 비아프란치제나 이외에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티베트의 길, 미국의 PCT 등 가톨릭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에서 의미 있는 순례길들과, 종교의 의미는 없더라도 많은 이들이 도전하는 길들이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10번이 넘는 순례길을 다녀오신 부부는 이제 나이가 들고 존이 마을의 시장 역할도 하게 되면서 성에 정착하셨고 그 이후로는 이 길을 찾는 순례자들을 위해 각자가 낼 수 있는 만큼의 돈만 받고 숙식을 제공하시며 이 성을 열어놓고 계셨다.


 식사를 마치고 벽난로 앞에서 우리도 은퇴하고 난 뒤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운영해야지 하는 꿈을 작게 꿔보고 있는데, 존과 마리가 아까 우리 가방을 잠깐 들어봤는데, 말도 안 되게 무겁다고 짐을 좀 볼 수 있냐고 하셨다. 낑낑대며 배낭을 끌고 와서 노트북이며 지도책, 드라이백 등을 꺼내고 있는 걸 보시고 가방 무게를 물어보시더니 두 분은 혀를 끌끌 차셨다. 그리고 이렇게 걷다가는 로마까지 가기 전에 몸이 다 망가진다고 짐을 정리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제야 왜 그렇게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무릎과 발목이 아팠는지 이해가 갔고, 약국이 보일 때마다 사 모으던 무릎보호대, 발목보호대, 파스들이 떠올랐다. 이번 주말에는 아라스라는 큰 도시에 도착하게 되고, 부활절이라서 안 그래도 3일 정도 쉬며 머무르려 했기에, 그때 택배로 이탈리아에 있는 고모에게 짐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존의 진두지휘와 마리의 조언에 맞추어 짐 정리를 시작했다. 메모도 좋지만 핸드폰이면 충분하니 노트북은 당장 보내 버리라 하셨고, 일기장은 보시더니 반 농담으로 벽난로에 던지려고 하셨는데 내가 “그것만은 절대 안 돼요!”라고 손사래를 쳐서 이삭 것은 보내고 내 것은 남겨두기로 했다. (같이 열심히 일기장까지 만들어 놓고 늦은 밤 졸음을 이겨가며 내가 일기를 쓸 때, 빠르게 포기하고 자던 이삭이 야속했는데 기다렸다는 듯 택배로 부치겠다고 해서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하지만 나 대신 텐트까지 지고 다니고 있었기에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이것 말고도 식사를 해 먹는 일은 사실 쉽지 않으니 가지고 다니던 냄비나 그릇도 정리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고, 10일이 지났지만 라면 끓여먹기를 실패한 이후로 한 번도 꺼내 본 적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릇도 보내기로 했다. 짐 정리의 압권은 지도책에서 지금까지 이미 지나온 부분은 찢어서 버리라고 하시며, 나무 써는 칼로 직접 썰어 주시는 존과 그 모습을 신나서 비디오로 찍고 있는 이삭이었다.

 짐 정리 이외에도 여러 가지 순례길 팁을 주셨다. 우리는 지금까지 숙소를 구할 때, 정보가 없으면 에어비앤비를 찾았다. 존은 마을마다 있는 마을회관에 전화해서 순례자라고 하고 잘 곳을 청하면, 마을회관의 남는 회의실이든, 체육관이든 아니면 사람을 연결해주기도 한다는 조언을 건네셨다. 물도 처음 출발할 때 하루 마실 물을 다 가져가지 말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 물 좀 얻을 수 있냐고 물어보면 많이들 주시고 곳곳에 식수대도 찾을 수 있으니 500ml 정도만 가지고 출발하라고 덧붙이셨다. 그러면서 프랑스어라고는 둘이 합쳐 이삭이 중학교 때 배운 2개월의 실력이 다였던 우리에게, 질문할 수 있는 짧은 서바이벌 프랑스어도 적어 주셨다. 존과 마리는 그렇게 식사는 빵과 조금의 버터로 버티시고, 숙소는 청해가며 하루 10~20유로 정도만 쓰며 순례를 하신다고 했다. 무턱대고 낯선 사람한테 물을 구하거나 화장실을 묻거나, 잘 곳을 청하는 일을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우리어서 할 수 있을까 겁이 났는데, 두 분은 거절당하면 다른 곳에 또 물어보면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존과 마리는 그런 것이 진짜 순례를 하는 것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겸손을 배울 수 있다고 강조하셨다. 확실히 존과 마리와의 저녁을 기점으로 우리의 순례 여행은 180도 바뀌었고, 해보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삶의 지혜와 겸손을 배우는 경험으로 우리를 열어주었다.

서바이벌 프랑스어

 결국 우리 가방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입을 것과 물통, 세면도구, 칼 그리고 잘 곳을 위한 침낭과 텐트, 길을 찾을 나침반 그리고 일기장이 끝이었다. 그리고 남은 2개월 동안 아무 부족함 없이 지냈다. 돌아온 지 2년이 지난 지금, 아이 둘의 탄생과 더불어 짐은 점점 불어났고, 이사를 할 때마다 5톤짜리 트럭을 채우는 짐의 양에 놀란다. 그러면서도 항상 필요한 것이 생각나고, 부족한 것이 보인다.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5톤짜리 트럭을 채우고도 무언가 더 필요한 지금의 우리가, 사실은 배낭 두 개만으로 아무 문제없이 살 수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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