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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2. 2020

불행을 받아들이는 방법

Day 11. 프랑스 떼루안 - 아메츠

 우리는 순례길 전 용감하고 무식하게 딱 한 번의 연습만 마치고 길에 올랐다. 그래서 주인을 잘못 만난 우리의 몸은 첫 며칠간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하고 참 많이도 힘들어했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듯이, 매일매일의 여정 안에서 우리 몸도 나름대로 순례길에 착실히 적응해가고 있었다. 현재 우리 가방의 무게는 둘이 합쳐 30kg. 국적이 미국인인 이삭이나 여자인 나는 군대에 가본 적이 없어 섣불리 말하기 조심스럽다만, 우리나라 육군의 완전 행군 시 무게가 여름철 16.5kg, 겨울철 20kg이라고 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는 매일 반쪽 행군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무게도 가볍게 느껴졌고, 걷는 속도도 초반보다는 많이 빨라졌음을 매일의 기록이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가방 무게를 거의 다 지탱하고 있는 골반 부분에는 이미 24시간 멍이 들어있었지만, 순례자의 훈장 같은 느낌이라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멈추지 않는 강한 비로, 오전에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유지하기가 꽤나 어려웠다. 입에서는 계속 힘들다는 소리가 나오고, 어제 세탁기와 건조기로 뽀송뽀송하게 빨아 놓았던 모든 옷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닐바지마저 뚫고 다 젖었고, 신발에는 진득한 진흙이 달라붙어 모래주머니를 달고 걷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순례길을 걸으면서 몸이 힘든 날은 많이 싸우게 된다. 힘들면 누구라도 탓하고 싶어 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출발 후 2시간 동안 계속해서 그치지 않는 비를 맞고 걸은 후, 신나게라도 걸어보자고 이삭에게 노래를 틀자고 했다. 이삭은 자기는 빗소리처럼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도 좋으니 오늘은 듣지 말자고 대꾸했다. 비를 좋아하는 이삭이기에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지만 힘든 상황에서 나름 분위기를 끌어올려보려고 했던 노력이 좌절되니, 몸이 젖은 솜처럼 더 무거워지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빨리 이 힘든 하루가 끝났으면 싶은데 그 와중에 오늘의 길 찾기 담당은 나였다. 조금이라도 길을 줄여보고 싶어서 구글 위성사진을 보고 지름길을 만들어 가보자고 제안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상황에 나름의 책임감으로 앞장서 걷다 보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길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 엄청난 경사의 언덕 앞에 다다라 있었다. 이삭이 여기로 가는 게 맞을까 의구심을 보였지만, 돌아가기도 너무 멀어 보여 거의 우기다시피 해 네발로 진흙 언덕을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은 모래를 파는 채석장이었다. 더군다나 우리의 방향대로 가려면 철조망을 넘어가야 했다. (우리가 이 며칠 만에 불법으로 넘은 철조망만 몇 개인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힘든데 이상한 곳으로 이끌었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푹 숙이며 걷고 있는데 이삭이 고프로를 켜고는 밝게 달려왔다. 그리고 리나가 며칠 만에 엄청 어드벤처 지수가 올랐다며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조금도 나를 탓하지 않고 음악을 틀지 않아도 분위기를 밝게 하는 이삭의 모습에 발에 달렸던 모래주머니를 하나 둘 채석장에 떨어뜨리고 걸어 나갔다.


 어제 마트에서 사 둔 점심을 먹으려 비를 피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2시쯔음이 됐을까 우리의 사랑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앞면에 조그마하게 나 있는 문과 양쪽의 조그만 창문 2개가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버스정류장은 마치 작은 오두막 같았다. 길에서 만난 오두막 안의 벤치에 점심 도시락을 꺼내 놓았다. 그러고 보니 평소 먹었던 빵과 살라미가 아닌 오늘의 점심메뉴 당근, 쿠스쿠스, 감자칩이 선물 같았다. 조금씩 오전에 방전되었던 순례자 배터리가 충전되는 것 같았다. 젖은 양말도 벗고 쉬면서 조그마한 창문 밖으로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며 점심을 먹고 나니 이삭이 말했다.

“우리 순례길 음악 플레이리스트 만들어보자! 나중에도 그 노래들 들으면 순례길 생각이 막 새록새록 나지 않겠어?”

아침에 내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꺼내 준 것이 짐작되어, 고마움에 마지막 남은 배터리 빈칸까지 고속 충전되었다. 그리고 오후의 발걸음은 훨씬 가벼웠다.

 비는 오후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힘들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쿠키를 입에 넣어 당을 충전하고, 속도가 너무 느려지기 전에 한 박자씩 쉬어 가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꾸준히 목적지는 가까워져 왔다. 그렇게 숙소가 있는 마을에 도착할 때쯤에는 드디어 비가 잦아들었고, 털이 복슬복슬해서 꼭 카펫을 닮은 개 루루가 있는 오늘의 숙소에 도착했다.


나는 사실 강아지를 무서워하는 편이다. 산책하다가도 강아지가 보이면 같이 있는 사람 뒤로 살짝 숨거나 돌아가는 걸 택한다. 그런데 루루는 순례자들을 많이 만나봐서 그런지 짖지도 않았고 너무 빠르게 가까워져 오지도, 그렇다고 우리를 피하지도 않았다. 마치 새로운 사람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듯, 우리 주변을 돌아다녀서 강아지를 무서워하는 나도 같이 사진 하나 남기고 싶을 만큼 친근감이 가는 강아지였다.

 루루가 맞아준 오늘의 숙소는 순례자들을 위해 농부 부부가 꽤 오랫동안 운영하고 계시는 b&b였다. 미음 모양의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쪽 면에는 동물들이 있는 우리가 있었고, 한쪽 면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가, 다른 쪽에는 두 분과 아드님이 함께 사시는 집이 있었다. 장 밥티스트라는 멋진 이름의 할아버지가 우리를 반겨 주시며 익숙한 몸짓으로 순례자 숙소를 소개해 주셨다. 고되었던 하루 뒤에 도착한 숙소는 안락하고 검소하지만 필요한 것이 다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러 가족이 사는 집에 초대되었는데, 벽난로 안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수프 통에서 떠 주신 수프는 맛있고 따뜻했고, 호빗의 집에서 먹는 수프 같아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식사를 하며 나누었던 이야기 중 놀라운 이야기가 몇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바깥에 있는 동물 우리가 비둘기 우리라는 것이었고, 할아버지는 그 비둘기로 곧 있을 비둘기 날기 대회를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이삭은 흥분해서 초롱초롱해진 눈빛으로 식사하자마자 가서 보자고 했지만,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비둘기라면 서울역 비둘기만 생각이 났던 나는 떨떠름하게 웃고 말았다. 비둘기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사실 진짜로 적고 싶었던 놀라운 이야기는 1000명이 넘는 순례자가 이 곳에 묵었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영어를 잘하지 못하시는 듯 조용하셨던 할머니는 눈빛을 반짝이며 손수 꼼꼼하게 남겨두셨던 그곳을 지나갔던 분들의 사진과 방명록을 보여주셨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고모, 삼촌, 아직 걷지 못하는 아이와 유모차까지 온 친척들이 비아프란치제나를 시작해서, 로마에 도착할 때는 그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해 함께 걸어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띠게 했다. 또 불편한 다리로 휠체어를 타고 캔터베리부터 로마까지 완주하셨다는 한 여자분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그 모든 이야기가 창문 밖 마당에서 찍은 사진들로 남아있었고, 할머니는 괜찮다면 내일 아침 우리의 사진도 찍어서 한국에서 신혼여행으로 이 길을 걸었던 순례자들로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고 하셨다. 우리의 이야기를 이 길 위에 더할 수 있다는 것이 영광일 따름이었다. 아침부터 쉽지 않았던 하루였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이 길을 이삭과 함께 걷고, 그 발자국을 함께 남겨간다는 생각에 참 행복했다.


 신혼여행으로 순례길을 걸으면서, 이 길이 결혼생활을 먼저 한 번 살아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도 맞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3년 정도의 결혼생활 뒤에 더 와 닿는 문장은 이것이다.

모든 가정은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하지만 그 불행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따라 행복하거나 불행할 수 있다.

 아픔과 어려움이 없는 가족은 없다. 그렇지만 심지어 그 불행의 크기에도 행복의 여부가 달려있지 않다. 다만 그 불행을 안고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그 가정을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한다는 것을 보았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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