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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18. 2020

방수가 아니어도 괜찮아

Day 10. 프랑스 위스크 - 떼루안

 순례길 용품을 산다면 꼭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 단어. 'water- resistant'는 'water-proof'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생활방수쯤 된달까? 영어가 모국어인 이삭도 ‘water-resistant’라는 우리의 바람막이를 배짱좋게 믿었다. 

 아침부터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했다. 아침식사를 하고, 미사를 드리는 중에는 굵지 않았던 빗방울이 길을 걸을 수록 거세어 지기 시작했다. 순례길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비를 맞으며 걸어야 하는 날이라 처음으로 비 올 때 입는 비닐바지를 덧대어 입고, 배짱 좋게 길을 떠났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는 방수는 ‘water-proof’였고, ‘water-resistant’는 생활방수 쯤 되었다. 바람막이가 쫄딱 젖어 안에 입은 후리스까지 보이게 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찝찝함은 당연했지만, 보슬보슬 봄비가 이제 막 봄이 찾아와 푸릇해지고 있던 잔디언덕에 더 푸른빛을 띄워주는 걸 보며 걷는 길은 꽤나 행복했다. 비라는 것이 참 그런 것 같다. 안 맞으려고 우산으로 요리조리 피해보다가 젖어버리는 머리칼이나 바짓단은 그렇게 사람을 찝찝하고 불쾌하게 하는데, 그냥 맞으려고 마음먹고 빗속에서 놀아버리면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 조용필의 ‘바운스’, 피치퍼펙트 OST같은 댄스음악을 들으며 통통 걸으니 우리의 발걸음도 뽀송뽀송했다. 점심식사로 마을에 들어가 프랑스식 백반집에서 런치메뉴를 챙겨 먹기도하고, 쉬어야 할 때 버스정류장을 발견해 잠시나마 비를 피하기도 했다. 오늘의 길은 진흙밭을 지나 16km를 걸었지만 더 필요한 것이 없다고 느낄 만큼 행복한 길이었다. 어제 히치하이킹도 하고 택시도 타서 사실 우리 스스로 순례자가 맞는지 좀 찔리던 차였고, 게다가 오늘 잘 숙소 주인분은 우리가 어제 택시탔다는 것도 엉겁결에 알게 되셨는데, 다행히 오늘은 비도 맞으며 걷는 진짜 순례자가 된 것 같았다. 어깨를 펴고 숙소에 갈 수 있겠다며 마음이 좀 떳떳해졌다. 기쁘게 걸어서 그런지 어제 예약해 두었던 떼루안의 순례자 숙소 에덴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가 채 되지 않았다. 

 순례자 전용 숙소를 써본 것은 에덴이 처음이었는데, 에덴은 정말 예쁘고 크고 깔끔한 별 다섯 개짜리 숙소였다. 그리고 어제 전화로 우리가 그 순례자 맞냐고 물어보았던 주인 아저씨 알란은  비가 많이 와서 걱정하셨다며 오늘의 유일한 손님인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숙소 한편에 놓여있는 커다란 세계지도를 보여주셨다. 각 나라마다 왔다 간 순례자들이 핀으로 자기 나라를 꽂아 두는데, 지도 위 한반도에는 핀이 없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한국에서 에덴에 온 순례자였다. 왠지 더 뿌듯한 마음으로 핀을 꼽고, 기념사진 촬영도 한 뒤 숙소사용규칙 설명을 간단히 들었다. 그리고 갈 때 쓰고 가라며 게스트 북도 보여주셨는데, 페이지를 피시면서 올해의 첫 순례자가 우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때까지 아직 추운 날씨와, 아무리 사람이 적다지만 단 한 명의 순례자도 만나지 못하는 걸 보고 우리가 시기를 좀 잘못 잡았구나하고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짐작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게스트북에는 지금까지 지나쳤던 순례자들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You saved my life. 당신이 절 구했어요.’라는 메모가 눈에 띄었다. 그 순례자는 혼자서 비가 오는 날 밤 10시에 길도 잃고 방향도 잡지 못해 헤매다가 알란아저씨한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저씨가 그 시간에 차를 몰고 나가 허허벌판 가로등 하나 없는 들판을 1시간 동안 뒤지다가 쪼그려 앉아 울고 있던 그 분을 태우고 오셨다고. 아주 건장한 남자분이었는데도 밤이 저물어가는 들판에서 혼자 길을 잃어버렸다는 절망감에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오늘 지나온 길을 더듬어 봤을 때, 아 이 곳이었겠구나 싶을 만큼 휑한 구간이 있었어서 그 분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우리의 낯선 천사들은 한결같이 인상이 좋은 분들이었는데, 알란 아저씨도 장난기가 살짝 보이는 인자한 미소를 가진 큰 키의 인상 좋은 분이셨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알란은 한쪽 다리가 조금 불편한 분이셨다.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것뿐만 아니라 캔터베리부터 로마까지 완주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게 어려우니 이렇게 대리만족을 하고 계시다고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잘 지내라고 인사를 하신 뒤에 집으로 가셨는데, 몇 분 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또 다른 순례잔가? 하면서 열었던 문 앞에는 한손에 와인을 든 알란아저씨가 계셨다. 우리가 허니문을 왔다고하니 허니문에는 와인이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화이트와인 한 병을 가지고 오신 것이었다. 우리도 못 챙기고 있는 신혼여행을 대신 챙겨 주심에, 그리고 급하게 다시 오신 모습에 감동이 밀려와 눈물이 살짝 돌며 뭐라도 해드릴 게 없을까 고민했다. 아저씨는 우리에게 로마에 도착하면 꼭 엽서 하나 해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아무래도 순례길 초입에 계시다 보니, 로마에 도착하고 나면 순례자들이 많이 잊는 것 같다며 뒷머리를 긁으셨다.


 알란아저씨와 인사를 나누고, 오늘 저녁은 시간도 넉넉하고 부엌도 준비되어 있는 만큼, 결혼생활 처음으로 같이 요리해서 집밥을 먹어 보기로 했다. 유럽의 정육점에 큰 로망이 있던 이삭은, 꼭 정육점에 가서 두껍게 고기를 썰어 달라고 하겠다고 눈빛을 반짝이며 장을 보러 나섰다. 정육점에서 손가락을 이렇게 보여주며 두꺼운 스테이크 고기를 부탁하고, 칼로 썰어 봉지에 담아주시기까지 초롱초롱하게 바라보다가 소중한 고기를 안아들고 나와 마트로 갔다. 다행히 프랑스는 식료품자체는 비싼 편이 아니어서, 빗속에서 걸어 한껏 배도 고팠기에 양껏 욕심을 부려 당근도 3개, 큰 양파도 2개, 커다란 모짜렐라 치즈 덩어리 1개와 토마토, 샐러드를 담았다. 장을 보고 한아름 사가지고 돌아오는 우리의 모습은 항상 배고픈 순례자와 첫 집밥을 해먹을 생각에 신난 신혼부부의 합성판이었다. 서툰 두 요리사는 한참을 걸려 요리를 마치고 스테이크와 카프레제, 구운 야채와 빵을 접시에 담고,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냅킨까지 요리조리 접어서 포크에 끼워 세팅을 한 다음, 이 식탁의 격을 높여줄 알란이 주신 와인을 잔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둘 다 무척 피곤했던 탓에 와인 한잔에 뻘개져서 헤롱헤롱댔고, 티셔츠에 츄리닝 바지, 슬리퍼 차림이었지만 기분만은 호텔 루프탑 라운지에서 수트와 원피스를 입고 먹는 식사와 다름없었던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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