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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이 된 피터팬 Sep 26. 2022

나의 <죽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뮤지컬 <엘리자벳>, 어쩌면 현대인의 사투

그녀의 죽음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나를 기억하니?"


뮤지컬 <엘리자벳>을 봤다. 자유를 갈망한 오스트리아의 황후. 길들여지지 않은 순수와 열정을 품은 그녀가 실의 엄격한 규율과 통제에 괴로워하며 반대 세력에 맞서는 투쟁은 가히 고독하고 드라마틱하다.


[ 우리 모두의 이야기, 매일의 사투 ]


책임과 의무가 주는 부담을 유난히 크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남들과 같은 크기의 고난과 시련도 크게 느끼고 자기 연민에 깊이 빠지기도 한다. 확실히 성향 차이는 존재한다. 아마도 엘리자벳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자리의 무게가 주는 압박과 부담이 엘리자벳에게는 더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거의 모든 나라의 왕가들에서 자유를 반납하고 그 대가로 권력과 풍족한 생활을 영위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도 엘리자벳처럼 왕실 생활에 답답함을 느끼고 자유를 갈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그들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으로 태어나 기본적으로 사람으로서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많은 부담들을 짊어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성장의 지표로 여겨지는 나이를 기준으로 기대되는 역할과 모습들이 있고, 어른으로서, 학생으로서, 직장인과 가장으로서 요구되는 역할 수행과 의무들이 우리의 삶을 촘촘히 구성하고 있다. 그러니 구속과 자유의 대립, 책임감과 자의식의 사투는 인간사의 문제요, 모든 인간이 겪는 매일의 사투다.


대개의 사람들은 일상에서 죽음을 느끼지 않는다. 아직은 먼 훗날의 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삶에서 죽음의 존재를 피부로 느끼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면 그때부터 죽음이 가까이에서 숨 쉬고 있음을 문득문득 마주하게 된다. 마치 엘리자벳에게 죽음 '토드'가 수시로 나타나 함께 춤을 추자고 유혹하는 것처럼 말이다.


엘리자벳의 경우 어렸을 때 나무에서 떨어진 시점부터 인격화된 죽음인 '토드'를 보게(느끼게) 된다. 검붉은 색의 치명적이고 유혹적인 존재, 이 죽음을 따라간다면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불확실하고 위험하지만 달콤한 유혹이 엘리자벳의 이후 삶에 점철되어 있다.


시각화된 죽음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러닝 타임 내내 인물로 형상화된 죽음을 보며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삶과 죽음의 공존을 생생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죽음은 먼 훗날 나를 찾아오는 게 아니다. 내 삶 곳곳에 함께 있다가 내가 그의 손을 잡거나 그가 나의 손을 잡는 순간 나와 함께 이 시공간을 벗어나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죽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며 오늘을 살아낸 것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삶에 대한) 의지력을 보여준 것이란 생각도 든다.



[ 우울 사회에서 죽음의 숨결 ]


그렇다면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대개 죽음은 미지의 영역으로 인간에게는 두렵고 무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해골이라든지 어두운 使者라든지 붉은색의 피로 형상화되곤 한다. 그리고 한편으론 엘리자벳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죽음 뒤 평안을 숨겨 둔 매혹적인 영역이 되기도 한다. 뮤지컬 <엘리자벳>에서는 어둡고 음산하지만 치명적인 죽음의 이미지를 신성록 배우가 잘 표현해주었다. 그를 보며 나의 '죽음'씨(남성, 여성, 또는 중성 일지 모르는)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자연의 섭리이기에 죽음을 무섭게 느끼는 것도 좋지만은 않지만 죽음을 친숙하고 거부감 없이 느끼는 것도 좋다고 하긴 어렵다.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낮아지면 베르테르 효과처럼 자살이 전염되기도 하며 생명의 소중함에 둔감해질 위험도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우울의 시대다. 죽음의 유혹이 크다. 현대인들 대다수가 경증의 우울증을 겪는다는 글들이 넘쳐난다. 우울증까지 가진 않더라고 우울증상이란 것을 경험해본 적은 있을 것이다. 코로나 블루처럼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에서, 이상 기후라는 악조건에서, sns와 현실의 괴리감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우울은 현대인이 공통적으로 겪는 현상인 것이다.

 

뮤지컬에서 엘리자벳이 인격화된 <죽음>과의 관계를 고뇌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죽음이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어루만지고, 죽음의 숨을 느끼게 하며, 강렬하게 충동을 부추기게 할 때마다 그녀는 자주 흔들렸다. 우리 사회에서 흔들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엘리자벳이 보여주는 위태로움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울, 그것은 불쑥불쑥 찾아와 내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인다. 한 번 퍼지면 걷잡을 수 없이 온몸과 마음을 그림자로 물들인다. 부정적 생각과 부정적 말과 상태에 사로잡혀 그 감옥 안에 갇혀버린다. 애써 탈출하면 얼마 못가 또 잡혀가곤 한다.


평생 <죽음>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공통 숙제에서 죽음의 숨결을 더 크고 빈번하게 느낀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우울감이 높은 상태일 수 있다. 대개의 사람은 일상에서 죽음을 망각하며 살아간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나는 얼마나 죽음을 가깝게 느끼고 있는가 점검해본다.


[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가 ]


눈물샘이 터진 건 엘리자벳이 자살한 아들 루돌프의 묘지를 찾아가 묘를 끌어안으며 후회하는 장면에서였다. 루돌프의 묘를 끌어안으며 "생전에 너를 이렇게 안고 사랑한다고 해주었더라면 지금과 달랐을 텐데"라고 말하는 엘리자벳. 그 말이 너무 슬펐다. 사랑을 줬더라면 루돌프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안아주기만 했더라도,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했었더라면 루돌프는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양육의 핵심은 사랑이라고 코칭해주시는 오은영 선생님이 생각났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표현과 전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여기서도 확인했다. 루돌프가 가여웠다. 어쩌면 시대의 희생자이며, 소피(프란츠 요제프 엄마)와 엘리자벳 간 권력 싸움의 희생자로서 구조적 살인(뒤르켐의 '숙명론적 자살')일지도 모르겠지만 루돌프의 자살에는 사랑의 결핍도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물론 사랑 표현이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다. 나와 나 사이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일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많이 말을 건다. '이 바보야, 이것도 못하다니 정말 실망이다', '왜 이렇게 못 생겼니', '누가 널 온전히 사랑해줄 수 있겠니' 등.


나를 격려하는 말은 의식적으로 "힘내자! 아자아자!"를 뱉지만 우리가 스스로에게 무의식적으로 (대개는 속으로) 뱉어내는 말들은 비난과 비하, 원망과 나쁜 말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내가 나를 죽여가고 있는 것이다. 엘리자벳이 아들의 묘를 끌어안고 우는 모습에서 내 묘를 끌어안는 나를 상상했다. 지금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중에 엘리자벳처럼 후회할 수 있겠다란 생각에서 말이다. 내가 나를 좀만 더 사랑해주었더라면, 내가 나의 편이 되어주었더라면 하고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엘리자벳을 계속 따라다니는 <죽음>. 모든 현대인들은 정도만 다르지 어느 정도의 우울을 안고 살아간다. 각자의 <죽음>을 대면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서부터는 죽을 때까지 문득문득 그의 존재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


가끔은 무섭고 가끔은 궁금하고 가끔은 평화로워 보이는 <죽음>이다. 그림자처럼 계속 따라다니며 보였다 안보였다 그 존재의 노출을 반복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질병과 사고가 아닌 이상 그는 나를 막무가내로 데려가진 않는다. 나에게 의사를 물어본다. 같이 춤을 추자고, 같이 가자고 말이다. 내가 싫다고 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좀 위안이 된다.


인격화된 죽음을 시각적으로 보고 엘리자벳의 우울증을 간접적으로 느끼며 눈물을 많이 흘렸다. 언젠가 느꼈던 나의 <죽음>을, 언젠가 마주할 나의 <죽음>을, 선명하게 느꼈기 때문이리라.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그러나 오늘 나는 살아감을 선택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자유를 찾고 누리기 위해 살아감을 선택할 것이고, 나를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줄 것이다. 엘리자벳의 고뇌는 우리 모두의 고뇌이지만 우리는 다른 삶을 상상하고 살아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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