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돈이 많아도 먹고 싶은 것을 잘 사드시지 않는다. 평생 아끼며 살아야 한다는 게 몸에 배어서란다. 그러나 자식의 마음으론 그게 아니라, 이것저것 해드리면 항상 이런 쓸데없는 것으로 돈 낭비를 한다며 혼을 내신다. 이렇게 뱉어내시는 험한 말이 사실은 "좋다, 고맙다"의 반어법인 것을 알아듣는 것은 자식의 몫.
처음엔 혼이 나지만 사드리고 해 드리면 고마워하신다. 귀찮게 뭘 자꾸 오냐고 말씀하시지만 막상 가면 금방 간다고 서운해하신다. 나가서 사 먹지 말자고 하시지만 막상 짜장면을 사드리면 혼자 5분 만에 호로록하신다. 이렇게 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할머니에 대해 하나씩 알게 된다. 이번에 처음 안 사실은 할머니는 소고기보다도 전복이나 딱새우를 더 좋아하신다는 것.
할머니의 말은 곧이곧대로 이해하면 안 된다.
[인생도 정규분포 곡선]
84세 할머니(할머니의 여동생)가 93세 할머니를 챙기신다. 정규분포 곡선처럼 인생의 변곡점에 도달하면 시간이 반대로 간다. 챙겨주던 사람이 챙김을 받는 역전현상이 발생한다. 따라서 챙겨줄 수 있는 나이에 주변을 더 많이 챙겨줘야 한다. 세상의 이치가 그런 것 같다.
영원히 일직선으로 가는 건 찾기 어렵다.
[티비에 효도 위탁]
명절이 시작하기 전, 할머니께 택배를 보냈다. 친구분들과 나눠 드실 간식을 가득 담아서. 할머니께 전화하면 티비소리가 먼저 들린다. 할머니께서는 세상 돌아가는 모든 소식을 알고 계신다. 정치 뉴스, 세계 뉴스, 사회 뉴스- 모르시는 소식이 없다. 어떤 뉴스에 어떤 아나운서가 나오는지 한 명씩 이름을 읊어주실 때도 있다. 자식보다 티비가 할머니의 벗이 되어준다. 어쩌다 보니 티비에 효도를 위탁하고 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두 분 다, 두 번째 결혼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너무 인색해서 첫 번째 부인에게 이혼을 당하셨고(그 옛날에 이혼을 요구한 그분은 정말 신여성, 멋지다) 할머니의 첫 남편은 폐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할아버지 동생의 아내 분이 미모의 과부였던 할머니를 할아버지께 소개했고 두 분은 그렇게 결혼하셨단다.
이혼까지 당했던 할아버지의 인색함 때문에 할머니는 평생 자신을 위해 돈을 써본 적이 없으셨다. 평생 일만 하셨고, 그래서 지금도 그게 습관이 되어 쉬지 않고 일을 하려고 하신다. 제주도 작은 마을에서 그렇게 일만 하신 우리 할머니.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그 넓은 세상을 한 번 보지 못 하신 그런 할머니가 너무 가엽다. 그래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할머니께서 잃고 살았던 본인을 회복하는 것 같다(할아버지는 손녀, 손자에게는 좋은 할아버지셨지만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먹고 싶은지를 조금이나마 표현하시고, 고집은 세져서 보일러 하나 틀어놓기가 힘들지만 자기주장도 강하시다. 자존감이 조금은 높아지신 것 같아 기쁘다. 할머니가 좀 더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이번 설에는 코로나 때문에 할머니를 뵈러 갈 수가 없다. 그래서 할머니를 더 생각하기로 했다. 나의 가엽고 귀여운 할망,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