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관조가 아닌 실천의 대상
주체적 할머니와 민주주의
7시에 기분 좋게 눈을 떴다. 빼놓을 수 없는 모닝커피타임~ 혼자 보리빵 네 개를 커피, 차와 함께 먹는다. 아침은 커피를 마시며 명상하기. 책 구절을 적은 공책을 커피와 음미한다. 이런 여유가 좋다. 직장을 가지게 되면 못 누릴 이런 여유를 지금. 맘껏. 즐겨야지. 조용한 아침.
그동안 택배를 하도 시켜서 집 앞에 택배 상자가 쌓여있다. 제주도는 쓰레기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이제까지는 제주도 내에서 나오는 쓰레기는 제주도에서 소각 및 매립했었는데, 인구 유입으로 인해 감당할 수가 없어서 쓰레기를 제한하는 요일별 배출제를 시행하고 있다. (2016년 5월 기준 66만 명을 넘었단다. 관광객 고려 시 80만 명에 육박) 나부터 쓰레기를 줄여야겠다. 쌓여있는 택배 상자를 보니 심각성을 느낀다. 반성과 다짐으로 시작한다.
오늘 제주도 날씨가 너~무 좋았다. 바람도 그리 세지 않고 햇빛이 따사롭다. 기분 좋은 날씨면 어김없이 밖으로 나가야 한다. 여유로운 자만이 즐길 수 있는 특권이니까.
해안도로에 들어서자 바다의 짠 냄새가 기분 좋게 스며든다.
이야!! 바다다!!! 오늘은 바람도 세지 않아 바다가 잔잔하다.
창가에 혼자 앉아서 바다도 보고 비치되어 있던 잡지도 읽었다. 캠퍼스 잡지였는데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라는 글이 있었다. 마치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카페를 나와서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우리 집으로 가려면 한라 도립미술관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95번 버스를 탔다. 그런데 방향을 거꾸로 타서 하마터면 조수(제주 할머니 집이 있는 곳)로 갈 뻔했다.
생각난 김에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내일 우리 집(노형동)으로 오셔서 주말 같이 보내고 놀러 가자고.
할머니 曰 "생각해보고 다시 연락할게"
흐흐흐. 할머니의 반전이다. 생각지도 못한 할머니의 답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할머니의 성격이 많이 변하셨다.
유교사상으로 무장하고 가부장적이신 할아버지 생전에는 할머니가 엄마 말씀을 빌리자면 "노예"처럼 사셨다. 할아버지의 아내로 사시면서 자신의 주장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셨고 한 번도 돈을 자신에게 써보질 못하셨다. 즉, 주체적인 삶을 살아보질 못하셨다.
우리 제주도 할아버지는 손녀에게는 사랑이 많으시고 손녀가 공부를 잘하는 것을 좋아하셨고 특히 내가 교환학생 때 쓴 돈 중 천만 원은 할아버지께서 주신 돈이다. 나에겐 좋은 할아버지셨지만 좋은 남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살아오신 우리 할머니가 달라지셨다.
자기주장을 말하고 올해 여든아홉이신데 본인의 소원은 통장에 있는 돈을 쓰지 않고 자기가 벌어서 죽을 때까지 쓰시는 거란다. 시골에는 일손이 부족해 아직도 할머니는 친구들과 남의 밭일을 돕는다. 그리고 받은 돈을 모아두신다. 할아버지께서 할머니께 남겨주신 돈은 쓰고 싶지 않으시다고. 주체적으로 살고 싶으신 거다. 요즘 본인 돈을 쓰는 재미를 아셨다. 밥도 사주시려 하고 이력서를 쓰신다고 올해 초에 증명사진도 찍으셨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를 즐겨 부르신다.
할머니가 주체적으로 사는 모습이 더 행복해 보인다. 할머니를 생각하니 할아버지도 보고 싶다. 좋은 남편은 아니셨지만 좋은 할아버지셨고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주신 분이시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죽음"이 우리 제주도 할아버지의 장례식이었기 때문. 죽음이란 무엇일까. 인생의 유한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을 던져주시고 우리 할아버지는 떠나셨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 어떻게 떠날지 모르니 지금 이 순간 표현할 수 있을 때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를 많이 표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내게 물질적, 정신적 유산을 남겨주셨다. 감사하다...
집에 돌아와 빔 프로젝터를 켰다. 1차로 드라마를 봤다. 2차로 영화 한 편을 봤다. 빔 프로젝터로 보니 영화관이 따로 없었다.
영화까지 보고 3층으로 올라왔다. jtbc에서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과 관련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탄핵 결정,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의미."대한민국에도 희망이 남아있다는 말로 들렸다. 그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도 결국은 법 아래에 있다. 썩을 대로 썩어서 죽은 나무인 줄 알았는데(너무 염세적인가) 그 속에는 생명력이 남아있나 보다. 역사를 살고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관제데모가 판을 치고, 태극기가 촛불에 대항하는 이미지로 변질하고 세대갈등이 심화되는 등 탄핵 여정에 있어서 슬픈 일도 많았다.
민주주의가 오늘날 최선의 대안이라고 배웠지만 그 단점에 대해서는 특별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론으로는 배웠지만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민주주의의 허점을 많이 보았다. 촛불민심이 국민의 뜻이냐 태극기 무리가 국민의 뜻이냐 하는 물타기와 한 나라를 이끄는 대통령이란 직위를 자질이나 능력에 따른 임명이 아니라 다수결이라는 선거제도에만 의존하는 시스템.(특히나 역피라미드형 태의 인구구조를 가진 사회에서 다수결에 의존하는 민주제의 허점)
엘리트주의를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나 자체도 똑똑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번 정권이 보여준 모든 것들이 중우정치의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야 할 것 없는 정당들의 방관과 무능을 목도했고 언론의 중요성도 뼈저리게 느꼈다. 민주제는 오늘날 최선의 대안이지만 최선이 되려면 이러한 허점들을 보완하고 시민들의 주체적인 참여, 지속적인 관심이 필수적이다. 우리가 그동안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교훈들을 잊지 말자. 무엇이 맞는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계속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있어야지. 내가 살아가는 사회니까.
신영복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인생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다. 정치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를 주체적으로 사는 노력을 해야겠다. 알찬 하루가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