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아홉, 고운 우리 할망

조수리 깡촌이 하영 가고싶다

by 어른이 된 피터팬

경면 조수리. 우리 할머니 댁은 제주에서도 시골 깡촌에 있다. 그래서 더 좋은 할머니 댁!(그런데 요즘은 엄청 도로가 잘 닦이고 주변에 올레길이 생겼다.)
10시에 사촌 언니가 나를 데리러 오기로 했다. 나는 모닝커피를 밖으로 가지고 나와 마시며 주희 언니를 기다렸다. 언니랑 이모 드리려고 만든 쿠키도 한가득 챙겨 왔다. 오랜만에 주희 언니를 봤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할머니 댁에 갔더니 마농 밭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혼자서 농사지으신 마농들. 이걸로 우리 마늘장아찌를 해주셨구나.

할머니 댁에 들어가니 할머니께서 두 팔 벌려 나랑 주희 언니를 안아주셨다. 올해 여든아홉이신데도 정정하시고 고운 피부를 가지고 계신 우리 할머니. 오랜만에 뵙는데 머리숱도 풍성하고 예쁜 진주 목걸이도 하셨다. 요즘 할머니께서 할아버지 생전에 생각할 수도 없었던 주체적인 발언을 하셔서 깜짝깜짝 놀랐는데
직접 뵈니 높아진 할머니의 자존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원래는 할머니 모시고 한림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으려 했는데 할머니께서 우리 온다고 녹두백숙을 하고 계셨다. 우리 엄마랑 이모는 아직도 엄마 밥을 먹을 수 있는 행복을 누리고 계신다. 할머니 요리 솜씨는 여전히 최고다! 나이가 들면 간을 못 맞춘다고 들었는데 우리 할머니는 간도 변하지 않았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 식당에서 먹는 백숙보다 더 맛있는 게 할머니 백숙! 할머니들은 손이 크셔서 배불러도 계속 더 먹으라고 떠 주신다. 식후 디저트라고 주신 제주산 키위도 한 바구니다. 할머니 댁에만 가면 할머니의 사랑에 배가 뽈록해질 수밖에 없다.

밥과 키위를 먹고 나서 할머니 집 대청소! 할머니께선 아무래도 위생적인 생활을 하시기 어렵다. 냉장고에 버릴 것들도 다 버리고 이불 털고 청소기로 구석구석 먼지 제거하고 걸레로 닦고. 그렇게 한바탕 청소를 하고 좀 쉬다가 밭으로 나갔다. 할머니는 우리 가져갈 마늘을 챙겨주신다고 마늘밭에서 마늘을 뽑으신다. 나도 할머니를 따라가서 거든다. 할머니는 행여나 소중하게 가꾼 마농들을 밟을까 봐 조심하라고 하신다. 할머니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모든 순간을 나중을 위해 남기고 싶은 나의 욕심.

할머니께서 뽑으신 마농들을 옮겨서 겉껍질을 뜯어내고 말라버린 부분도 제거한다. 할머니, 이모, 엄마, 주희 언니, 나 이렇게 둘러앉아서 마늘을 다듬으며 도란도란 이야기한다. 옛날 집에 얽힌 추억들을 푼다. 엄마 어렸을 적 키웠던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엄청 영리했다고 한다. 개랑도 잘 지내고 말도 잘 듣고. 하루는 이모랑 엄마가 초등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송아지랑 개가 집 마루에 올라와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고. 할머니도 그 송아지가 막 어질었다고 하셨다. 흥에 겨우셨는지 어느새 할머니는 노래 한 가락을 푼다.

그렇게 마농 밭에서 놀고 이야기하며 뽑은 마늘을 다 다듬었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필요하신 것들을 사러 같이 한림으로 나갔다. 한림은 바닷가 마을이다. 수협 근처에서 생선 비린내가 물씬~ 조명 달아놓은 오징어 배들도 보이고 길고양이들도 호시탐탐 생선을 노린다. 일요일이라 사람도 없고 문 연 가게도 별로 없다. 한적하다. 밥을 안 먹고 왔으면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근처 자장면 가게에 갈 텐데 다들 너무 배가 불러서 생각이 없었다. 돌아다니다가 문을 연 큰 슈퍼마트를 발견! 슈퍼타이, 우동, 요구르트, 계란 등 할머니가 필요한 것들을 샀다.


장을 다 보고 원래는 협재 해수욕장에 가서 커피를 마시려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지친다고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하시는 바람에 자동차 안에서 에메랄드빛 바다를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할머니 연세가 여든아홉이니 체력이 우리 같을 순 없다. 우리 할머니 이렇게 돌아다니시는 것도 대단해!!


집으로 돌아와 바로 침대에 누우시는 할머니. 세상 가장 편한 자세로 TV를 시청하신다. 우리 할머니 요즘 심심해서 TV만 계속 보시는데 뉴스 내용도 다 아시고, 드라마 배우들도 다 꿰뚫고 계시다. (할아버지도 생전에 뉴스만 계속 돌려보셨는데 우리랑 같이 뉴스 보시면서 저 아나운서는 누구다 이 아나운서는 누구다라며 다 외우고 계셨다.) 좀 쉬면서 내가 구운 쿠키도 먹었다. 주희 언니는 멈출 수가 없다며 가지고 온 쿠키를 거의 다 먹었다. 뿌듯 뿌듯. 나중에 더 맛있게 구워준다고 했다.


그렇게 할머니 침대에 모여서 TV 보고 떠들고 쿠키 먹으면서 놀다 보니 어둑어둑. 7시 즈음이 됐다. 할머니는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가라고 하셨다. 차에 탄 우리에게 손을 흔드시는 할머니에게서 축제 후에 남겨진 더 큰 외로움이 느껴졌다. 서울에 가기 전에 할머니 뵈러 더 많이 와야겠다.


할머니 댁에 다녀오니 하루가 다 가 있다. 알차게 지낸 일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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