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나방 한 마리가 계단에서 부동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알아서 나가겠거니 하고는 내버려 뒀는데 오늘 아침에 다시 보니 옆으로 쓰러져 누워있다. 죽은 것 같았다. 죽은 나방을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라 접사를 찍어보았다. 눈 두 개와 길쭉한 코. 나방한테도 얼굴이 있다. 새삼 깨달았다. 그냥 날개 두 개가 펄럭이는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나방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얘도 생명체구나 싶었다. 눈도 감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나방이여 안녕.
일요일.
계획에 없던 할머니 댁 방문. 엄마는 원래 가기로 했었지만 나는 감기가 아직 안 나아서 집에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일요일이라 밖에 나가고 싶고 할머니도 자주 못 뵈니까 엄마 갈 때라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 따라나섰다. 최대한 할머니한테 감기 안 옮기도록 조심하면 되겠지.
장을 보러 갔다. 할머니한테 필요한 거 있으시냐고 전화로 여쭸더니 블랙커피가 필요하시다고. (당뇨 관리 때문에 믹스 커피를 끊으셨다.) 커피 외에도 할머니 드실 딸기랑 엄마 드실 참외랑 고구마, 내가 먹을 샌드위치를 샀다. 양손 가득 먹거리를 들고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내가 같이 올 줄은 모르셨다가 나를 보시고는 매우 좋아하셨다. 두 팔 벌려 나를 꼭 안아주셨다.
할머니는 앉지도 않으시고 바로 쑥 지짐을 해주셨다. 마당에서 직접 뜯으신 쑥으로 해주시는 쑥 지짐. 뜨거울 때 찢어 먹으니 더 맛있어서 두 장을 순식간에 먹어버렸다. 그리고 할머니 간식인 유과도 꺼내 먹고 마늘장아찌도 먹고. 할머니 댁에만 가면 평소보다 더 많이 먹게 된다.
할머니께서는 임플란트를 하셨기 때문에 딱딱한 걸 못 드신다. 그래서 참외도 못 드실 거란 생각에 할머니만 드시게 딸기를 씻어 드렸는데 정작 딸기는 안 드시고 참외를 드신다. 숟가락으로 참외를 벅벅 파셔서 드시는데 그 모습에 한참을 웃었다. 어떻게든 먹고 싶으면 먹게 된다고. 할머니 귀엽다고 막 웃었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이랬다. 할머니랑 점심까지 먹고 근처 올레길을 걷는다. 그리고 저녁에 제주시로 돌아온다. 근데 완전히 틀어졌다. 갑자기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가시겠다는 거다. 아까 대화 도중 잡초 이야기가 나왔는데 할머니께서 잡초를 뽑아주시겠다고 당장 가자고 허겁지겁 나갈 채비를 하셨다. 엄마는 내일 일정 때문에 다음 주 토요일에 오셔서 주무시고 일요일에 가시라고 두 번이나 권했지만 할머니는 다음 주부터 매우 바쁘시다면서 혼자 1박 할 준비를 다 하셨다. 엄마는 할머니께 안 된다고 말하면 할머니가 상처 받으실까 봐(노인이 되면 서운한 것도 많아지기 때문에 말을 더 조심해야 한다.) 시간을 끌었다. 결국 할머니의 추진력을 막을 수 없었다. 우리 마당에 심어주시겠다며 어디선가 호박씨와 콩을 주섬주섬 챙기셨다. 잡초 뽑을 호미랑 낫도 야무지게 챙기셨다. 하는 수 없이 할머니의 추진력에 이끌려 계획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할머니는 작업복으로 갈아입으셨다. 좀 쉬고 놀다가 하시라고 해도 지금 해야 하신다면서 기어코 마당으로 나가신다. 나도 따라 나가서 할머니가 하시는 것을 봤다. 잔디만 놔두고 민들레 같은 잡초들을 뿌리째 뽑아야 한다. 나는 민들레가 잡초 중에서도 억센 애인지도 모르고 저번에 민들레 홀씨를 마당에 흩날렸다. 하하하.. 무지가 부른 참사다.
햇빛이 유난히 따사롭다. 할머니를 따라 잡초 뽑기에 돌입!! 하지만... 30분 정도 지났을까? 바로 넋 다운. 무릎이 너무 아프다. 할머니는 힘들지도 않으신가. 90세이시니 나보다 무릎도 더 안 좋으실 텐데. 엄마가 그만하시고 쉬시라고 해도 할머니는 마당에서 들어오시지를 않는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새참 드시라는 말에 잠깐 들어오신 할머니. 아까 내가 먹으려고 산 샌드위치를 할머니랑 새참으로 나눠 먹었다.(나는 한 것도 없이 새참만 먹었군)
그리고 좀 쉬시고는 또다시 마당에 나가셔서 한참을 검질 하셨다. (할머니께서 계속 검질 검질 그러셔서 뭔가 했더니 잡초를 의미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마당에 계속 있다 보니 이웃집 분들도 만났다. 주 중에는 이웃을 만나 뵙기 힘들었는데 이유를 알았다. 법원 근처에서 해장국 가게를 운영하시기 때문에 아침 7시~7시 반 즈음에 출근하셔서 주 중에는 뵙기가 어려운 것. 서울 아파트에 살 때는 옆집 분들이 누구신지 잘 모르고 사는데 여기서는 이웃이 있어서 좋다.
할머니는 몇 시간을 그렇게 마당에서 보내셨다. 나는 검질이 너무 하기 싫어서 할머니 곁에서 돌아다니다가 소나무 손질을 했다. 관상용 소나무가 위로 막 자라지 못하게 옆으로 퍼지게 하려면 길게 자라는 꽃?을 따 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소나무 꽃을 따고 잎을 잘라 주었다. 우리 집에 있는 나무가 배롱나무인 것은 할머니를 통해 오늘 처음 알았다. 원래 마당에 잘 안 심는 나무라는데 왜 여기 있지?
오늘 한참 마당 손질을 하며 나는 더 느꼈다. 마당을 갖는 것은 매우 멋진 일이지만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은근히 손이 많이 간다. 물론 내가 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할머니 집에는 가스레인지만 있다. 그런데 가스레인지 밸브가 손에 안 닿아 할머니가 의자에 올라가 켜고 끄고 하시는 것을 보았다. 위험하게 보였다. 그래서 가스레인지를 사드리고 싶었다. 마침 당근 마켓에 얼마 쓰지 않은 전자레인지가 올라왔다. 게시물이 올라오자마자 나는 바로 사겠다고 연락을 드렸고 바로 가져다주셨다. 나는 인턴 해서 번 돈을 아직 다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 돈에서 전자레인지 값을 지불했다. "할머니 이건 손녀가 일해서 번 돈으로 할머니 사드리는 거예요. 잘 쓰셔야 해요~" 생색도 한 번 냈다. 그리고 할머니께 작동법을 알려드렸는데 한 번도 써 보시질 않으셔서 너무 어려워하셨다. (예전에 할아버지 계실 때는 전자레인지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아닌가?) 안 되겠다 싶어서 조리 시작 버튼에 빨간색 스티커를 붙였다.
"할머니 이 빨간색만 누르시면 돼요. 한 번 누르면 30초, 두 번 누르면 30초 더.
빨간 거 옆에는 취소예요. 만약 할머니가 잘못 넣었다 싶으면 취소 누르세요. 전자레인지 문은 이거 누르면 돼요. 그니까 맨 아래 세 개만 누르시면 되세요."
혹시 몰라서 십 분간 전자레인지 학습을 했다.
"할머니 전자레인지 문을 열어서 물을 30초 데워보세요. 취소 눌러보세요."
그리고 플라스틱이나 유리를 넣지 말라고 말씀드렸으나 걱정이 되어서 집에 있는 큰 머그잔 두 개를 싸 드렸다.
"할머니 우유건 물이건 국이건 그냥 이 컵에 담아서 데워 드세요. 이 컵만 사용하셔야 해요. 다른 거 넣으면 폭발해요."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가스레인지보다는 덜 위험할 것 같아서 잘 사용하셨으면 좋겠다. 할머니 검질이 다 끝나고 우리는 할머니께서 싸 주신 나물을 가지고 된장국을 끓여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3층으로 올라가 좀 대화를 하다가 할머니는 이내 씻지도 않으시고 잠자리에 드셨다. 할머니가 3층 침대를 차지하셔서 나는 2층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오늘은 할머니의 색다른 면( 추진력 甲)을 본 잊지 못할 하루였다.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