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온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제주에서의 첫 주, 제주의 시간은 느리게 가는 줄 알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들, 가고 싶은 곳들, 읽을 것들을 막 적으면서 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처음에는 느리게 흐르는 하루하루가 너무 심심했다. 빨리 서울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점점 적응이 되면서 나 자신도 느려졌다. 딱히 한 것도 없는데 하루가 다 갔다.
한 달 전 하고 싶었던 것들을 적어둔 공책을 꺼내어 그 옆에 한 달간 한 것들을 적어보았다. 기대했던 것의 70%를 달성했다. 그러나 목표 달성과 별개로 내 만족감은 90%다. 무엇보다도 자연친화적인 삶이 마음에 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것이 1층 블라인드를 걷고 마당을 보는 것이다. 까치는 거의 매일 우리 집 마당에 있는 나무로 놀러 오고 가끔 놀러 오는 토끼를 만나면 행복해 미칠 것 같다. 신발도 제대로 안 신고 마당으로 뛰쳐나가 토끼를 관찰한다. 닭 우는 소리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심심하면 초원의 소들을 보러 간다. 주방에서 보이는 집 뒤쪽 누군가의 밭? 에는 꿩 여덟 마리가 놀러 오기도 하고 버스 타러 가는 길목에 말 가족을 만나기도 한다.
확실히 자연에 더 가까워졌다. 서울에서와는 보는 것이 달라졌다. 말할 상대는 없지만 기쁨을 주는 대상은 많아졌다. 지금까지 제주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소소한 행복. 공부하거나 일을 한다면 시간이 아까워서 혹은 몸이 지쳐서 하지 않았을 행동들을 여기서는 하고 있다. 여유로운 삶이 허락하는 비효율의 행복이다.
꾸리꾸리한 날씨. 요즘 점점 습해지면서 벌레, 곤충들이 집 안으로 기어들어 온다. 오늘 화장실 천장에서 만난 큰 거미. 거미와 눈싸움하다가 나와버렸다. 알아서 나가기를.(내가 건드리지 않으면 저 거미도 날 안 건드리겠지)
심심해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집 근처에 있는 도립미술관이 생각났다. 한 달이 넘었는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립미술관. 오늘 드디어 가 봤다. 도립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버섯농장. 카페 가면서 매번 봤는데 뭐하는 곳인지 몰라서 그냥 지나갔었다. 그런데 오늘 기웃기웃하다가 어떤 분과 눈이 마주쳤는데
"어떻게 오셨어요?"
"아 그냥 구경하고 있었어요."
"들어오셔서 버섯 차 마시고 가세요."
그렇게 해서 아가리쿠스 버섯 농장을 들어가게 되었다. 이름이 특이해서 보고 있었던 것인데 얼떨결에 버섯 차도 얻어 마시고 궁금한 것도 물어봤다. 아가리쿠스 버섯은 브라질이 원산지로 대장암 치료에 좋은 버섯인데 레이건 대통령도 대장암 때문에 이 버섯을 먹었다고 한다. 내가 이제까지 본 버섯은 대개 나무 옆에 붙어있는 버섯인데 아가리쿠스 버섯은 특이하게 말똥에서 자란다. 하우스에 들어가 직접 봤는데 예상과 다르게 똥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말똥은 어디서 가지고 오냐고 물었더니 인근 말 목장에서 어차피 처치 곤란이라 가져가라고 한다고. 그래서 버섯 농장 주인 분께서 친히 말똥을 가져와 건조한 다음에(이때 수분과 냄새가 빠진다) 종균을 투입하고 흙을 덮는다. 또 습도와 온도 조절이 중요해서 재배하기 까다로운 버섯이라 신의 버섯이라고도 불린다고. 그만큼 이 버섯이 변비나 생리통에도 좋다고 여기 지날 때마다 버섯 차 마시러 들리라고 하셨다. 대놓고 살 생각 없다고 했는데도 엄청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계속 샛길로 새다가 드디어 제주도립 미술관에 도착. 정원에는 소수의 조형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적한 분위기였다. 제주 도립 미술관은 4월 한 달간 무료입장 행사를 진행한다. 성인 요금이 1000원밖에 안 하지만 그래도 무료라니 더 좋았다. 4월은 제주 4.3 사건이 있는 달이라 이를 주제로 한 전시들이 주가 되었다. 1층에는 4.3 미술 아카이브: 기억 투쟁 30년이 2층에는 제24회 4.3 미술제 전시가 있다. 또한 1층에는 제주도의 해녀들을 많이 그린 탈북화가 장리석의 전시회와 해녀를 모티브로 한 동화인 애기 해녀 옥랑이 전시도 있었다.
4.3 사건을 직접 겪은 세대가 아니지만 아직도 좌우 진영논리로 대립하는 우리 사회에 살면서, 그리고 제주도가 고향인 사람으로서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그 아픔이 전해지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제주공항에서 4.3 희생자 유골이 발견됐고 공항 부근에 더 많은 유골들이 있을 것이라는 뉴스를 접했었다. 희생자의 유골마저 수습되지 않고 흐지부지 시간에 묻혀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난다.
친일, 독재, 4.3 사건.... 제대로 청산된 과거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이 모든 건 과거가 아닌 현재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논의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 가장 슬픈 사실은 청산에 대한 희망이 점점 옅어진다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양극화가 더 심해질수록, 먹고 살기가 더 힘들어질수록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과 멀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오늘 전시를 보면서 4.3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가슴이 뜨거워졌고 희망에 다시 다가갈 용기가 생겼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과거가 아닌 현재임을 잊지 않도록 계속 되뇌고 되뇌는 노력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4.3 사건 전시 작품들은 대개 흑백만을 사용한 강렬하고 역동적이고 거친 작품들이 많았다. 투쟁 의지를 여실히 드러내거나 학살이 보여주는 잔혹함과 그로 인해 남겨진 어두운 슬픔을 표현했다. 전시를 둘러보면서 마음이 들끓고 차분해지고를 반복했다.
전시를 다 돌아보고, 1층 카페테리아에서 이 여운이 가시기 전에 윤진이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시 제목 : 기억 투쟁. 기억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할 것들을 다시 기억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