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다

돈으로 묶인 삶

by 리나신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하고 발을 들였다.


사촌끼리 친하게 지냈었다. 동성인 사촌들보다 이성인 사촌들이 더 많았고 옆집에 살며 어울렸다. 그래서 이성 친구들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 영향일까, 동네 소꿉친구들도 대부분 이성이었다. 그렇지만 동성 친구는 적었다. 기껏해야 한두 명. 스스로 느끼기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힘들었다. 관심사가 달랐고, 감정의 변화도 적은 편이라 재미없어했던 것 같다. 그들은 내가 만만했고, 편 가르기나 교묘한 따돌림은 사회생활에서도 이어졌다. 흔한 동성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사회에 나와보니 그 부러움도 금방 사라졌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생각보다 의미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축하합니다. 합격하셨습니다.”
첫 직장이었다.


직장이 무엇인지 개념조차 확실하지 않을 때 입사한 곳은 대기업의 계약직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았고, 몇 명은 군대에 있었다. 취업을 당장 해야 한다는 압박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계약직’이라는 단어조차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아르바이트 사이트에서 지원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인 줄 알았고, 그 착각은 두 달이나 이어졌다. 동기가 정정해주지 않았더라면 착각은 더 오래갔을 거다.


직장이라는 세계가 머릿속에 들어오던 순간부터, ‘내가 무엇으로 돈을 벌어야 하지?’라는 현실적인 질문이 따라왔다. 그전까진 기회가 널려 있다고 느꼈는데, 이 시점부터 갑자기 세상이 좁아졌다.


학생이라 학비도 마련해야 했다. 데이트 한 번, 퇴근 후 공부 한 번이면 남아 있는 시간도, 모아둔 돈도 금방 사라졌다. 하고 싶은 게 뚜렷하지 않은 채 사회로 밀려 나온 기분이 답답했다. 그래서 내일 배움 카드로 퇴근 후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그렇게 사회에 물들기 시작했다.


돈이라는 것 때문에 눈물로 밤을 지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편입을 하고 싶어서 학원을 알아보고 있었다. 슬쩍 이야기를 꺼내자 '그건 네가 알아서 할 거잖아.', '우리 돈 없어.'라는 대답만 돌아왔었다. 다른 친구들은 최소한의 지원이라도 받았고 그만큼 정보도 많았는데, 인터넷으로 알아보는 정보는 한정적이었다. 간절했지만 돈이 없었고 한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가고 싶던 대학은 포기를 하고 사이버대학으로 편입했다. 당시 원하는 학과가 있는 유일한 온라인 대학교였다.


부끄러웠다.

나는 ‘싫어서 안 가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돈이 없어서 준비조차 하지 못했다.

수시라는 제도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어차피 나는 안 된다’는 말을 너무 오래 들어서 시도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수시가 처음 생긴 시점으로 기억하고 있다. 내게 쓸 돈은 없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그런가, 주변에서 수시 지원을 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기력했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졸업하고 일을 하려고 했다. 돈을 모아 독립하고 싶었다. 공부도 관심 없었다. 학벌이 좋은 아버지 형제들과 사촌들 덕분에 압박은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공부할 환경은 아니었다 생각한다. '너는 안돼.'라는 말이 항상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가도 공부를 하진 못할 것 같다.


뒤늦게 수시를 알게 된 아버지가 한바탕 난리를 쳤던 것 같다.

자기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항상 하는 패턴이 있다. 조금씩 목소리가 커지고, 내 심장은 그 소리를 들으며 전기를 맞은 듯 요동치기 시작한다. 목소리가 특정 데시벨에 올라가면 몸의 체온이 떨어지고 식은땀이 난다. 그리고 표정을 지웠다. 시선은 바닥을 쳐다보고 귀로 들어오는 소리를 거르며 머릿속으로는 최대한 좋은 생각을 했다. 눈물도 흘리면 안 됐다. 그저 침묵을 유지해야 했다.

운이 좋으면 고함에서 끝난다. 운이 나쁘면 무언가 망가진다.


1996년에 출시한 영화 <마틸다>에서 삼촌이 마틸다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찢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눈앞에서 본 적이 있다.

'학원에 갔다 온 후 집에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라는 이유였다.

한 번은 핸드폰이 박살 난 적도 있다. 왜였을까.

내게 손을 올리는 건 중학교 때가 마지막이었다. 특이하게도 항상 내게만 그랬다. 동생은 맞은 적이 없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매일 밤 기도제목은 '고아가 되게 해 주세요.'였다. 어린 나는 그 말의 무게를 몰랐고, 다만 그게 살 길이라고 믿었다. 이 말의 무게를 알게 된 이후, 조금씩 후원을 하며 어렸던 나의 무게에 보상을 하고 있다.


계약직 업무는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관련 부서에 지원해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볼까 생각했다. 덜컥 합격했다. 동기들과는 조금 빠른 이별이었다. 온라인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나와 맞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렇게 버티던 어느 날,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만두고 싶었다.


질문을 했을 뿐인데 욕설이 날아왔다. 수화기 너머로 화가 쏟아졌다. 담당자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은 없었다. 한참 뒤에야 연락이 왔고, 돌아온 말은 오히려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모르냐”였다.

이건 의미 없는 일이구나,라고 느꼈다. 그래서 그만두려고 했다.


문제는, 가족이었다.
가족에게 말을 하면 결국 내 탓이 되었고, 모든 상황은 ‘내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 되었다.

성인이 된 후, 단 한 번 투정을 부린 적이 있었다. 정말 힘든 시기였다. 그냥 들어주길 바랐는데, 돌아온 대답은
“너 원하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는 거 아니다. 불평하지 마라.”

(순화한 표현이다.)

그게 전부였다.
그 일이 가족에게 내 마음을 전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래서 회사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 예상했던 답이 돌아왔다.
“세상이 그렇게 쉬운 줄 아냐.”
“다들 참고 다니는 거다.”

정말 다니기 싫었던 건지, 그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말대꾸를 했다. 그리고 결국 퇴사 허락을 받아냈다.


이후 내일 배움 카드로 들었던 강의가 나를 살렸다.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있고, 결과물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힘듦도 잊고 몰입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재미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타인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무언가를 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심화 학원도 찾아보고, 개인 스터디도 참여했다.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들이는 게 좋았다. 이런 때는 부모님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마음에 아무 경계도 두지 않고 웃으며 대화할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리고 원하던 분야의 첫 직장에 입사했다.

내 불안의 원흉이다.

그때는 아직 몰랐다. 그곳이 내 삶을 얼마나 뒤틀어놓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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