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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Oct 06. 2020

20년간 나 몰래 나인 척했던 그녀

혹시 누군가가 내 의료보험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면


며칠 전에 문학소년 작가님이 올리신 의료보험에 관한 글을 읽다가 문득 몇 년 전 나를 아주 놀라게 한 사건 하나가 떠 올랐다. 이 글의 영감을 주신 문학소년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그때로 돌아가 본다.








2017년 12월에 나는 퇴사를 하였다. 퇴사를 하자 건강보험공단에서 친절히도 변경된 보험 내용이 담긴 편지 한 통을 집으로 보내주었다. 직장 보험에서 지역 보험으로 의료보험이 변경되었고 매달 예상되는 보험료는 얼마라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회사에서 꼬박꼬박 보험료를 납부했던 터라 정확히 얼마를 내는지 관심도 없었던 건강보험이었는데, 이제는 이 보험료가 어떻게 산정이 되며 한 푼이라도 금액을 줄이려면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했다. (아 옛날이여!)


주위에서 오빠나 아빠 아래로 내 이름을 넣는 것을 확인해 보라고 하셔서 확인을 해 보았더니 나는 둘 다 해당사항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나는 내 명의로 지역 보험료를 매달 납부해야 했다. 보험료 산정 기준을 물어보니 현재 살고 있는 집과 차 등의 자산이 기준이라고 해서 집 계약서 등 필요서류를 제출한 후 처음 예상금액보다 조금 줄일 수가 있었다.


당시 나는 1월부터 3월까지 2개월간 쿠바에 가기로 되어 있었고 공단 직원분께 여쭤보니 한 달 이상 출국 시에는 출국 신고를 하고 보험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어차피 나는 국내에 없으니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필요도 없어서 엄마께 부탁드려서 쿠바로 떠난 다음 날 건강보험공단에 출국 신고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2개월 후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건강보험공단에 돌아왔다고 신고를 하였는데 얼마 후 집으로 한 통의 우편물이 도착을 했다.


뭐지? 하며 건강보험공단에서 보낸 우편물을 열어보니 이상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가 출국을 하고 한국에 없었던 날짜에 병원과 약국을 방문한 기록이 적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출국신고를 했는데 병원에 방문을 한 거면 보험료를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어 건강보험공단에 전화를 해 보았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는 분명히 출국을 하였고 기록된 병원과 약국은 내가 사는 지역도 아니었고 전혀 알지 못하는 곳이라고 말을 하였다.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혹시 내 주민등록번호가 도용이 되어서 다른 사람이 내 번호로 병원을 간 게 아닐까?


보험공단 김 과장님도 그럴 수가 있다며 한번 확인을 해 보시고 연락을 주신다고 하며 전화를 끊으셨다. 그리고 얼마 후 김 과장님이 다시 연락을 주셨는데 내 예상이 맞아 버린 게 확인되었다. 누군가가 나의 주민등록번호로 병원과 약국을 갔는데 하필이면 내가 건강보험공단에 출국신고를 한 후 한국에 없던 기간이어서 이 사실이 밝혀진 것이었다. 만약 내가 출국 신고를 하지 않았거나 그 사람이 내가 떠난 2개월 동안 병원이나 약국에서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지금도 모를 수가 있는 일이었다. 아찔했다. 지금 생각하면 하늘이 도운 것 같은데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나는 김 과장님께 나의 주민등록 번호를 도용한 사람과 전화통화를 하고 싶다고 요청드렸다. 그러자 김 과장님이 그 분과 연락을 하셔서 나랑 통화를 하겠는지에 대한 의사를 확인한 후 알려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녀는 나와 통화하겠다고 의사를 밝혔고 나는 그녀와 통화를 할 수가 있었다.


최대한 침착하자고 다짐하며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는 나보다 7살이 많았고 다른 지방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1997년도에 내가 갔던 어느 모임의 장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내 가방을 열어 나의 주민등록번호를 적은 것이었다. 그녀는 횡설수설하며 내가 주민등록번호를 그곳에 적었다고 했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누군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그녀의 말투나 정신상태가 정상적이진 않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자신이 일을 했던 곳에서 학대를 당하면서 삶이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도망치듯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살고 있는데 돈이 없어서 약을 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결국 그녀는 나의 주민번호로 병원을 갔고 약국에 가서 약을 샀는데 처음에는 떨렸겠지만 내가 그 사실을 몰라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계속 사용을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20년 동안 나의 주민등록 번호를 이용해서 나인 척 병원을 갔고 약국을 갔던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그녀는 미안하다고 나에게 사과를 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고. 약이 필요해서 그랬다며 용서를 구했다. 나는 혹시 다른 곳에 내 번호를 도용하진 않았는지 물어보았고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기초생활 수급자였고 정신에 문제가 있는 병을 앓고 있었다. 그녀의 얘기를 계속 듣다 보니 그녀가 안됐기도 했고 또 용서를 비는 그녀에게 너무 냉정할 수가 없어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더랬다.


그리고 다음날 건강보험공단에 가서 1997년부터 나의 의료 기록을 모두 요청했다. 그런데 건강보험공단에서는 최근 10년 치만 보관을 한다며 10년 치 자료를 프린트해 주었다. 나는 그 자료를 집으로 가지고 가서 한 장씩 꼼꼼히 확인해 보았다. 내가 사용한 것보다 그녀가 사용한 내역이 더 많았다. 그리고 그녀가 내 명의로 사용한 진료내역이나 처방받은 약을 확인해 보니 정신질환 관련이 많아서 나의 기록으로 남겨두기에 기분이 몹시 찜찜했더랬다.


그래서 나는 모든 자료를 건강보험공단에 제출하여 내 것이 아닌 기록 삭제를 요청했다. 삭제를 하는 데에는 몇 개월이 소요가 되었다. 그녀가 이용했던 병원과 약국과 일일이 확인을 한 다음 삭제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쿠바에 오기 전에 깨끗이 삭제된 기록을 확인했고 더 이상 나의 의료기록에 그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녀의 잘못도 잘못이지만 병원에 가면 본인 확인을 하지 않고 그냥 종이에 이름, 주민번호, 전화번호를 적기만 하면 진료를 받을  있는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의 허점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사건이었다. 우리의 개인정보는 이미 많은 곳에 유출이 되어 여기저기에서 다양하게 쓰이고 있을 거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내 명의를 20년간 사용해 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에는 너무 놀라 심장이 얼마나 뛰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무섭기도 했다.


지인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 많은 이들이 그녀가 불쌍하긴 하지만 그냥 두면 또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으니 아무래도 법대로 처리하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녀를 신고하려고 경찰서에 갔더랬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경찰서에 갔던 그 날 담당자가 부재중이었다. 대신 그곳에 계셨던 다른 경찰관인지 형사인지 하는 한 여성분께 이 이야기를 했더니 이런 경우는 두 번 다시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지는 않을 거라며 굳이 신고를 하지 않아도 될 거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그래도 할 거면 이렇게 하면 된다고 고소를 하는 방법을 친절히 알려 주셨다. 그분께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건강보험공단에서 그녀가 그동안 사용한 비용에 대해서 매달 조금씩 끝까지 청구를 할 거라고 했는데 나까지 고소를 해 버리면 기초생활 수급자인 그녀가 살기가 아주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그녀는 이미 겁을 먹을 만큼 먹었고 이제는 더 이상 내 주민번호를 도용하지는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고소를 하지 않았고 이 사건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녀를 용서해 준 게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다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이런 일도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인지하시고 나와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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