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에 한국에 와서 강원도 원주에 있는 지인의 별장에서 자가 격리를 했었는데, 그곳에 60인치 정도 되는 아주 큰 TV가 한 대 있었다. 그래서 도착한 첫날 요즈음 한국 TV에는 어떤 방송을 하는지 볼 겸 해서 한번 켜 보았는데 홈쇼핑만 가득하고 딱히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어서 그 이후부터 나에게 그 멋진 TV는 장식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의 TV에는 '광고'라는 것이 없어서 오랜만에 보는 수많은 TV 광고가 약간은 낯설게 다가온 게 있기도 했다.
자가 격리를 무사히 마치고 대구 본가에 왔는데 내 방에 작은 TV가 한 대 있었다. 그런데 보지도 않을 TV가 자리만 차지하고 있길래 엄마께 말씀드려서 치우고는 그 자리를 다른 용도로 활용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2주 전에 나와 아주 사이가 좋은(나는 오빠보다 올케와 사이가 더 좋다) 올케와 나를 꼭 닮은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조카가 나를 만나기 위해서 대구 본가에 왔는데, 올케가 그 핫하다는 드라마인 '펜트하우스'에 대해서 1편부터 상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토요일 밤에 우리는 함께 그 드라마를 시청했다.
너무 자극적인 내용이라 내 스타일의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열광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 올케가 없는 이번 주말에도 혼자 밤 10시에 거실에 나가 TV를 켜고 시청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 그 드라마를 보는데 두 여자 주인공이 목욕탕에서 청소를 하고는 밖에 나와서 자장면을 시켜 먹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자장면이 너무 먹고 싶어 졌다. 나무젓가락으로 자장면 그릇의 가장자리를 문질러서 비닐을 뜯는 장면이며 자장 소스를 잘 섞은 후 젓가락으로 둘둘 말아 후루룩 입으로 가져가서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옛날 생각이 마구 떠올랐다.
어릴 적에는 자장면을 참 좋아했더랬지!
500원짜리 동전을 모아서 잘 간직하고 있다가 자장면을 사 먹었을 때의 기쁨이란!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자장면을 먹지 않게 되었다. 소화가 잘 안 되면서부터였다. 자장면뿐만 아니라 짬뽕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라면 같은 면 종류를 많이 먹지 않게 되었고 이번에 한국에 와서도 라면은 올케가 왔을 때 게임을 하다가 밤에 출출하다며 다 같이 먹은 것 이외에는 없는데 갑자기 자장면이 먹고 싶어 진 것이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쿠바에서 먹었던 짜파 게*가 떠올라 버렸다. 유통기한이 3개월 지난 마지막 남은 2개 중에서 하나를 열었는데 새까만 밀가루 벌레들이 바글바글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아까워서 결국 먹었던 자장라면. 벌레와 상관없이 아주 맛나게 먹었던 그 짜파 게*가 생각이 났다.
사실 이번 주에 계속 아랫배가 살살 아파서(이유는 아직 모른다) 산부인과에 가서 각종 검사를 다 하고 어제는 내과에서 대장내시경도 해서 아직도 속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죽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이 야심한 밤에 자장면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딱히 배도 고프지 않은데 말이다. 결국 나의 이성보다 추억이 앞서버려서 소화가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그냥 먹기로 했다.
드라마를 보다가 물을 끓이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 거실로 와서 잠시 또 TV를 보다가 부엌으로 가서 면과 건더기 수프를 넣고는 한번 저은 뒤 다시 거실에 왔다가 면이 충분히 익었을 때 물을 버리고 액상수프를 넣어서 나무젓가락으로 잘 저어주었다.
잘 섞어진 자장라면을 그릇에 넣고는 적당히 익은 김치와 함께 먹어보았다. 어릴 적 먹었던 500원짜리 진한 소스의 자장면도, 쿠바에서 먹었던 아주 귀한 벌레 한가득 자장라면의 맛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맛있는듯했다.
아뿔싸!이미 잘 시간이 지났지만 조금 더 있다가 자야겠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속이 가볍게 되는 마법을 기대해보아야겠지.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