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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Mar 29. 2021

쿠바댁 린다, 공중파 라디오에서 인터뷰하다

쿠바 한인 역사 100년 기념


오전 10시 5분이 되자 미리 다운을 받아둔 KBS 라디오 Kong 애플리케이션을 열어서 <한민족 하나로>라는 프로그램에 접속을 했다. 시작 전에 아빠 핸드폰에서도 Kong 어플을 다운로드해 드려서 아빠도 거실 소파에 앉으셔서 같은 프로그램을 들으시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신 듯 꽤나 노련한 사회자의 목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십여분이 지나고 노래 한 곡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내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곧이어 사회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일이 쿠바에 한인이 가서 살기 시작한 지 100년이 되는 햅니다. 아직 한국과는 정식 수교가 이뤄지진 않았지만 쿠바는 이미 많은 한국인이 여행했거나 사는 나란데요. 해외에서 활동하는 동포를 만나는 이 시간!

오늘은 쿠바에서 신접살림하는 동포를 전화로 만나 쿠바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최현진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쿠바댁>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데, 쿠바 남성과 결혼했죠?

네, 저는 쿠바 남자와 결혼에서 쿠바에 살고 있는 쿠바댁 린다, 최현진이라고 합니다.


(이하 생략)


난생처음으로 나의 목소리를 공중파 라디오에서 듣는 순간이었다. 나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동안 나는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으면 몹시나 어색해서 쑥스럽고 어디 숨어버리고 싶곤 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클럽하우스에서 목소리가 참 좋으세요, 혹시 방송일 하셨나요?라는 질문을 몇 번 받고부터 내 목소리에 자신감을 가져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많이 어색하긴 하지만.






1921년 3월 24일, 288명의 한국인들이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서 증기선을 타고 쿠바에 도착했다. 그들은 1905년 당시 황성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돈을 벌기 위해서 배를 타고 멕시코로 갔던 한국인 1033명 중 일부였다. 부푼 꿈을 안고 멕시코에 도착했으나 그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20여 개의 애니깽 농장으로 팔려갔고 그때부터 힘든 노동자의 삶이 시작이 되었다.


하지만 낙후되었던 유카탄 지역과 달리 1920년대 당시 쿠바는 매우 잘 살아서 사탕수수를 자르는 노동자들도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일한다고 했고, 물을 마시지 않고 우유와 맥주를 마신다고 하는 소문이 들려왔다. 더군다나 쿠바에는 대학도 있다는 말에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약 300여 명의 한국인들이 쿠바로 온 것이었다. 그들 중 아바나에 정착한 이들은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기도 했으나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여전히 애니깽 농장에서 일을 하며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런 힘든 삶을 살아가면서도 일본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는 것에 동참하고자 그들은 없는 살림에 조금씩 쌀을 모았고 그것을 판 돈을 모아 쿠바에 있는 중국은행을 통해서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내었다고 한다. 그렇게 쿠바의 한인들은 조국의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었던 것이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결속력이 사라져 버리자 1953년에 쿠바 한인회는 해체가 되었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힘쓰셨던 분들은 돌아가셨지만 그들은 후손들은 아직도 쿠바에 남아서 조국을 그리워하고 있다. 현재 쿠바에 살고 있는 한인 후손들은 약 1,100여 명 정도가 된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대한민국 정부의 혜택으로 한국에 와서 공부를 하거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고 지금도 그런 친구들이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시간이 흘러 어느덧 쿠바 한인들이 쿠바에 정착한 지가 100년이 되었다. 그래서 <한민족 하나로>라는 라디오 채널에서 쿠바에 살고 있는 교민과 인터뷰를 하고자 했고 결국 그 기회가 소개를 통해서 나에게로 온 것이었다.


처음에 친한 동생이 이 인터뷰는 언니가 하면 좋을 것 같은데 하시겠냐고 물어봤을 때 잠시 망설이긴 했었다. 하지만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전혀 심각한 것이 아니었고 그냥 있는 그대로 하시면 된다고 해서 마음 편하게 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 며칠 후 질문지를 받고 열심히 준비를 했다. 답변을 적어 놓은 것을 몇 번을 읽으면서 수정을 하고 거의 외울 수준으로 준비를 한 다음 전화 인터뷰를 하였는데 인터뷰가 순서대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시간 관계상 건너뛰면서 하다 보니 잠시 당황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은 노트를 보지 않고 그냥 내가 기억하는 사실대로 인터뷰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첫 번째 인터뷰여서인지 많이 떨렸는데 끝나고 나니 작가님께서 웃으시면서 "처음이라 많이 떨리셨죠?"라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네, 떨려서 얘기를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씀드리자, "아주 잘하셨어요!"라고 하시며 칭찬을 해 주셨다. 작가님께서 나를 안정시켜주시기 위해서 좋은 말씀을 해 주신 거구나,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방송 전날 보내주신 녹화분을 들어보니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처음 한 인터뷰 치고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 날 저녁 8시 5분에 메인 방송이 나갔는데(오전에 한번, 저녁에 한번 두 번 하였다) 그때는 엄마가 들어보셨다. 처음에 엄마는 내 목소리가 아닌 줄 알고 내가 맞냐고 물어보시더니 다 들으시고 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니 말 참 잘하네!


아빠는 아직도 내가 쿠바에 사는 것이 많이 서운하신지 방송을 다 들으시고 나서도 그리 만족스러워하시지는 않으셨는데 반해서 엄마는 서운하시지만 당신 딸이 라디오에 나와서 요모조모 말을 잘하는 것 같아서 조금은 자랑스러워하시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런 표현은 전혀 하시지 않으셨지만.


'라디오 인터뷰 하나에 뭐가 그리도 좋으냐?'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인터뷰는 그냥 쿠바 관련으로서의 인터뷰가 아니라 쿠바인과 결혼해서 쿠바에 살고 있는 교민의 한 명으로서 쿠바 한인 역사의 한 페이지에 함께 하는 것 같아서 나에게는 무척이나 의미가 있고 뿌듯하기까지 하다.


그리하여 2021년 3월 24일은 쿠바 한인 역사 100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면서 내가 <쿠바댁>으로 첫 번째 공중파 인터뷰를 한 날이기도 하니 나의 기억 속에 두고두고 잊지 못할 날이 될 것이다.  


첫번째 공중파 라디오에 출연한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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